하강의 자유를 허합니다

by 다현

바닥이 올라온다. 아무리 정신을 붙잡으려고 해도 자꾸만 올라오는 바닥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


사실 이건 내 시점에서 내가 묘사하는 나의 모습이고, 남이 보는 시점에서의 나는 정반대다. 나는 내려가는 중이다. 고개가 숙여지고 머리가 한없이 아래로 향하며 자꾸 휘청인다. 예상했겠지만 이건 술에 취했을 때 나타나는 행동이다. 그냥 취한 것도 아니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그러니까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마셔야 포착되는 전형적인 만취 증상.


소주 한 잔, 캔맥주 100ml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지고 온몸이 울긋불긋해지는 '알쓰'(알코올쓰레기)인 나로서는 이렇게 꽐라(?)가 될 정도로 술을 들이키는 날이 많지 않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평생에 걸쳐 음주 후 바닥이 올라오는(머리통이 자꾸만 내려가는) 순간을 경험한 횟수를 세려면 단출하게 손가락 서너 개만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보통 이렇게 술을 잘 못 마시면 당연히 술을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예외다. 솔직히 술이 좋다. 약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술을 마셔야겠다고 다짐하고, 실제 술을 마시는 행위를 실천하기까지의 순간이 좋다. 혼술이든 누군가와 함께하는 술자리든, 술 생각이 나서 술을 사고 (솔집에 가고) 약간의 흥분감과 기대에 차 술병을 여는 일. 마치 스스로에게 '이제부터 느슨하게 풀어질 수 있다!'고 자유시간을 부여해주는 것 같아서 좋다. 비록 그 자유시간은 무한하지 않고, 술을 마시고 나면 얼굴이 벌겋게 변하며, 가끔은 구역질이 올라오고 다음날 머리가 아플 때도 있지만.


물론 바닥이 자꾸 올라오는 순간을 맞딱드리는 경험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바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는 건 바닥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뜻이고 필연적으로 두 발에 더해 두 손과 함께 걸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욕실 바닥에 앉아 화장을 지워야 할지도 모르고.


그래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대부분을 직립보행으로 보내는 인생에서 이렇게 바닥과 친밀해지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라는 어리석은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새삼 술이란 참 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더 위로 올라가지 못해 안달인 세상에서 술만 마시면 모든 걸 풀어놓고 마음 편히 아래로, 더 아래로 침잠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사회저항적이야. 남들은 두 발로 걸을 때 네 발로 기는 용기! 차갑고 딱딱한 욕실 바닥에 주저 앉거나 누울 수 있는 도전정신!


오늘 저녁엔 나에게 마음 편히 하강을 허하는 술을 마셔야겠다. 알쓰니깐 딱 캔맥주 330ml만 마셔야지. 그리고 기분 좋게 침대에 누워 폭신한 이불에 싸여 침잠해야지. 아래로, 더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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