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샤바 아이샤바 얼마나 울었을까
샤바샤바 아이샤바 얼마나 울었을까
어린이대공원으로 사생대회를 갔습니다. 이 노래가 아직도 나오더라구요.
“왜 동요는 새로 안 만들까요?”
제 질문에 쌤들이 까르르 웃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어릴 때에도 이 노래로 쎄쎄쎄를 했거든요. 요즘 아이들도 쎄쎄쎄를 알까요? 아마 하겠지요? 손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매우 경제적이고 재미있으면서 두뇌 발달에 좋은 놀이이니까요. 여하튼 놀랍게도 사회쌤이 그러는데 같은 노래여도 녹음은 계속 새로 하는 거라더군요. 물론 동요도 새로운 노래가 계속 나오겠지요. 옛 노래가 계속 유명해서 그렇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구요, 그 노래를 들으며 신데렐라 생각을 했습니다. 신데렐라는 힘들었겠다. 그런데 백설공주도 힘들었을 것 같고, 라푼젤이나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같은 역경을 이겨낸 여러 공주들이 떠오르네요. 동화 속 아이들은 대개 힘이 없고 지켜줄 어른이 없는데도 씩씩하게 잘 자랍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악행을 저질러도 선하게 크지요. 실제로는 참 어려운 일인데 말입니다.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대부분 소녀들입니다. 어린이도 약하고, 여성도 약한데 어린 여성인 소녀들은 가장 학대받기 쉬운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동화 속 주인공인 이 소녀들은 대부분 계모에게 학대를 당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읽는 동화는 계속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진 글이고 실제로 유럽에서 나온 동화의 원작은 내용이 좀 다릅니다. 주인공인 어린이가 학대를 당하는 큰 줄기는 같지만 원작 속의 어린이를 학대하는 부모는 거의 대부분 친부모입니다.
헨젤과 그레텔을 버린 부모도 원작에서는 친부모였고, 백설공주를 학대하는 어머니도 원작에서는 계모가 아니라 친어머니입니다. 정서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신데렐라처럼 계모로 바뀌었지만 실은 동화 원작의 나쁜 사람들은 대개 친부모이고, 현실 세계에서 아동학대가 일어나는 무대는 아이의 집, 악역은 친부모나 혈육인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아동 성폭력 가해자의 비율을 보면 압도적으로 가족과 친척이 많고, 아동 학대의 경우에도 계모나 계부가 아니라 친부모가 가해자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들도 많지만 악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동화들의 교훈은 어린이들에게 악한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빨간 모자는 성폭력의 위험이 있으니 낯선 사람을 경계하라는 것이고, 신데렐라나 백설공주는 주변에 학대받고 있는 아동이 없는지 살펴보라고 어른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지요. 그리고 아동들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인생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악한 사람들이 나를 가장 잘 보살펴 주어야 하는 사람이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인생을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지만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많은 사람 중에는 분명 그런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좋은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인생을 잘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악한 부모를 가진 것과는 다르게 부모님이 없는 것은 또 다른 아픔입니다. 대학생 때, 6개월간 강의를 듣기 위해 선교단체의 학생들과 공동체 생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기 위해 빌린 건물은 싱글맘이 임시 거주하는 기관과 부모가 키울 수 없는 아동들을 보호해 주는 기관 안에 있었습니다. 싼 가격에 건물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선교단체는 보육원 안의 작은 건물을 빌려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다른 공간에 있었지만 식당을 같이 썼기 때문에 아주 조금씩 마주칠 때가 있었지요. 그리고 전화를 하기 위해 공중전화에 줄을 섰다가 아이의 사연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엄마, 언제 와? 토요일에 온다고 했잖아. 보고 싶어. 으앙”
한참 길어지는 통화를 들으며 발길을 돌렸지요. 아이가 마음 편히 통화를 했으면 해서요. 저는 돌아갈 집이 있으니 엄마랑 다음에 통화해도 될 것 같았거든요. 아이는 아마 부모님이 계신 듯했습니다. 그런데 사정상 부모님이 키울 수 없어 보육원에 있게 된 것입니다. 아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에 엄마가 오지 않아서 아이가 전화를 건 것이지요.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 시설에서 돌봄을 받는 것만큼이나 부모님이 계신데 매일 기다려야 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아플까요.
우리는 식당에서 식판에 밥을 받았습니다. 배식은 조리사 어머니(저희는 그렇게 불렀습니다.)들이 해주셨는데 저는 밥을 매우 많이 먹는 편인데 팔목이 가늘어서 어머니들이 언제나 밥과 반찬을 조금 주셔서 매일 울적했지요. 식판에 밥을 먹는 것이 숟가락 긁히는 소리 때문에 불편하기는 했지만 크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학교에서 급식을 하는 느낌이었으니까요. 왜 나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밥을 적게 주는가 하고 매일 불평하기는 했지만요.
저의 불평이 쏙 들어간 날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는 식판이 아닌 그릇에 밥을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급식 시간에 식판에 밥을 먹어야 하고, 생활을 하는 보육원에서도 밥은 식판에 나오니까요. 보육원에서는 설거지나 비용 문제 때문에 일반 가정집에서 쓰는 그릇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드라마에서처럼 그릇에 밥과 반찬을 담아 먹고 싶다는 그 말을 듣다가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참으며 가슴에 메인 무언가와 함께 밥을 삼켰더니 그만 체하고 말았지요. 정부 지원이 나와서 반찬은 좋은 재료를 쓰는 편이었고, 어머니들도 늘 성심껏 반찬을 하시니 반찬이 참 맛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차가운 스테인리스 식판에 담긴 밥은 아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상처가 된다는 것을 저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돌봄은 더욱 세밀하고 따뜻해야 하는 것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학교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사연으로 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는 학생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낳고 가출하여서 엄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 한 아이도 있고, 할머니와 살거나 이모나 고모, 삼촌 등 친척과 사는 아이도 있습니다. 나이 드신 할머니의 생활비까지 벌어야 하는 학생들도 있지요.
삶이, 참, 고단합니다. 정말 잘 살아왔어요. 차갑고 아픈 시간들을 잘 버텨낸 당신에게 인생의 또 다른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아요. 인생이 동화 같지만은 않지만 살다 보니 인생에서 찾게 되는 공식들이 몇 가지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아주 추운 시기를 지나가면 따뜻한 시간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당신 인생의 따뜻한 시간이 빨리 오도록 오늘도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 잘 살아왔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주세요. 선물 같은 삶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