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입양아 85세 '최영월'
가족관계증명서(상세)
등록기준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해달2동 별빛골
본인 '이은혜' 1990년 09월 20일 900920-*******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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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부 '이영재' 1968년 01월 01일 680101-******* 남
모 '박이숙' 1969년 05월 01일 690501-*******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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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정보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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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최영월' 1939년 03월 01일 390301-******* 여
* 사실이 아닌 소설 속 내용입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최전방 지역에 살던 어릴 적 나의 시골 풍경은 나에겐 특별하고 희미한 빛으로 비친다. 그중에서도, 추억의 핵심에는 항상 나의 외할머니가 있었다. 나는 너무 어려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명확하게 떠올리며 그날의 일을 반복적으로 말하신다.
1992년 겨울, 동생이 태어나 엄마는 병원에 있었고 나를 돌봐주기 위해 그 산속 시골에 외할머니가 올라오셨다. 3살밖에 되지 않은 작은아이였던 나는 그날따라 팥이 가득 들어간 달콤한 붕어빵이 너무 먹고 싶었다. 그 특별한 맛, 유난히 달콤하고 부드러운 붕어빵. 그것은 단순한 음식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아마도 아이였던 나에게는 모든 것이 크고 신기했던 시절, 그 작은 붕어빵이 큰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할머니와 단 둘이 있었던 나는 울고불고 때를 쓰며 그 작은 붕어빵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 할머니를 힘들게 했다. 그 시절 집에서 시내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고 약 40분 동안 가야만 했고 버스에서 내려도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붕어빵을 파는 그 가게까지는 걸어서 30분이나 더 가야 했다. 그 길은 멀고도 험했지만 너무 어려서였을까? 작은 붕어빵에 집착해 2시간을 넘게 울었고 할머니는 나를 달래 가며 망설였던 끝에 결국 시내로 향했다. 3살밖에 되지 않았던 나를 업고, 할머니는 그 긴 거리를 걸었다. 할머니의 무게와 나의 무게, 그리고 뜨거운 햇볕 아래 흘리는 땀까지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 당시 어린 나의 작은 바람에 따라가야만 했던 긴 길, 그 고단함을 부담한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단지 아이의 일시적인 생떼 때문에 그런 여정을 선택한 할머니의 헌신에 대해 미안함과 동시에 깊은 감사의 마음이 몰려왔다. 할머니의 그 무거운 발걸음과 몸소 보여준 사랑은 나에게 큰 의미로 남아, 그때의 나는 그 의미를 모르고 단순히 원하는 것만을 생각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함께, 그렇게까지 해주신 할머니에게 얼마나 감사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느끼고 있다.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는 가장 먼저 붕어빵 가게를 찾았다. 할머니의 눈에는 단 한 가지 목표만 있었을 것이다. '손녀가 원하는 붕어빵을 사주자.' 그 당시의 붕어빵은 현금으로만 구매할 수 있었는데, 할머니의 주머니에는 딱 그 가격만큼의 돈이 있었다. 붕어빵 가게에 도착하여 할머니는 주문을 하고 붕어빵을 받아 나의 손에 넣어주려 했을 때 내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순식간에 빛을 잃고, 눈에 눈물을 머금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시장 안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걱정스러운 시선들이 집중되었고, 시장의 많은 사람들도 나서서 할머니를 도와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군인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어 할머니는 뛰어가 나를 살펴보았는데 그때 나는, 해맑은 얼굴로 과일가게에서 딸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먹고 있었다.
붕어빵을 사러 가는 길에 내가 '할머니.. 딸기..'라고 말했는데 할머니는 그저 아이의 지나가는 말로 듣고 나의 손을 잡고 붕어빵가게에 갔고 나의 머릿속에는 딸기에 빠져있어 붕어빵을 계산하는 틈을 노리고 과일가게로 향했던 것이다. 이후 과일가게 사장님이 주신 딸기와 할머니가 준 붕어빵은 나의 손에 들려졌고, 그 따뜻한 온기와 함께 나는 할머니의 품에서 행복을 느꼈지만, 이후 할머니는 다시금 나를 업고 집에 가기 위해 그 먼 길을 걷고 또 걸어 집을 나선 지 6시간 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아직도 나를 보면 이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러면서 '우리 붕어빵 사러 가자~'라고 말하신다.
붕어빵은 할머니의 사랑, 헌신, 그리고 모든 것
아직도 나는 달콤한 붕어빵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붕어빵 안에는 달콤한 팥 그 이상의 무언가 안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내가 할머니한테 붕어빵을 사드리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100번도 넘게 듣고 또 듣는다. 그러면 나는 딱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저 함께 붕어빵을 먹으며 웃는 얼굴로 '맛있어요!'라고 말한다. 아마도 나도 그것이 나의 최선의 감사 표현이었던 것 같다. 붕어빵 하나에 담긴 이야기는 그저 음식이라는 틀을 넘어서, 나와 할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의 증거로 남아있다. 할머니의 그 헌신, 사랑, 희생은 붕어빵을 통해 나에게 전해졌고 나는 그것을 영원히 잊지 않고 싶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남다른 애착이 있다. 생각해 보면 할머니와의 관계는 나에게 어릴 적부터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 특별함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흔들림없는 애착이 되어 할머니가 쓰러진 후 집으로 왔을 때 고민 없이 당연히 받아 들였다. 할머니의 그림자는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어떤 특별한 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던 것 같다.
천천히 그려지는 어린 시절의 풍경. 작은 마을, 아늑한 집, 그리고 항상 푸르던 그 곳의 숲과 그 중심에 계시던 나의 할머니.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그 미소와 따스한 품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감정, 어리고 부족한 아이였던 나를 품었던 할머니의 애정 모두 나는 어렴풋이 기억 하고 있다.
할머니의 집은 시간이 멈춘 듯한 아늑한 공간으로 현대의 건축물과는 다른, 옛스러운 향기와 따뜻함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초가집 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할머니의 주방이었다. 주방의 중심에는 아궁이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아궁이는 흔히 볼 수 있는 현대의 가스레인지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무를 태워 불을 지피며, 그 밑에 놓인 냄비와 팔은 달라붙는 불길에 의해 음식의 맛을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내 기억의 깊은 곳에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그 아궁이에서 언제나 부드러운 솜사탕처럼 달콤한 밥상을 차려주시던 할머니와의 식사 시간 이다. 할머니에 살면서 의 주방은 마치 마법의 방처럼 항상 다양한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불에 직접 닿은 솥뚜껑 위에서 구워지는 김치와 돼지고기를 생각하면 그 맛이 아직도 입 안에 남아있는 것 같고, 직접 끓여서 만든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는 그 진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었다. 아궁이의 따스한 불빛 아래에서 익혀지는 음식들은 그 자체로 한폭의 풍경화와도 같았다.
그렇게 할머니는 그 아궁이를 사용하여 나에게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그 음식들은 단순한 재료의 조합이 아닌, 할머니의 사랑과 오랜 경험, 그리고 아궁이의 따스한 불길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그렇기에 그 음식의 맛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하고 깊은 맛이었다. 그런 할머니의 주방에서 보낸 시간은 나에게 큰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궁이의 따뜻한 불빛과 함께 할머니의 음식을 맛보는 그 순간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소중한 기억으로 내 마음 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할머니와의 식사 시간은 단순한 먹는 행위를 넘어서, 서로의 이야기와 감정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 세상과 사람에 대한 교훈을 주기도, 나의 마음속의 작은 고민들을 해결해 주기도 했다.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마음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며,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더욱이, 어렸을 때 받았던 그런 상처와 아픔이 나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었을 때, 그것을 붙잡아 주신 것도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나의 길을 항상 밝게 비춰주는 등대와 같았다.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며, 때로는 나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아 주시기도 했다. 할머니와 함께한 그 시간들은 지금의 나에게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상처와 아픔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항상 응원하고 감싸주었던 할머니에게 깊은 감사와 애정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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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입양아 85세 '최영월'
그래서 이런 감정들의 기억 때문에 아픈 할머니가 엄마 '박이숙'의 집으로 오시는 것은 아무런 의심도, 놀라움도 없었다. 그저 당연하게 여겨졌고, '잘 오셨다 건강을 회복자'하며 할머니를 반겼다. 그리고 할머니 병간호에 정말 모든 가족들은 하나가 되어, 할머니의 심적 안락함과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밤낮없이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며, 할머니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박이숙' 나의 엄마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나와 나의 동생이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조금씩 우리의 일상은 점차 지치고 무거워져 가는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평일 아침 6시의 알람 소리와 함께 시작된 하루는 휴식 없이 이어지는 줄넘기와도 같았다. 할머니는 시골에서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시간에 맞추어 식사 준비를 마쳐야 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아빠는 출근 준비를 했고, 엄마와 나, 동생까지 부랴부랴 움직였다.
아침에 일어난 엄마는 부지런히 주방으로 향했고 그곳에서는 밥을 하는 소리와 엄마의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 동생과 나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엄마를 도왔다. 설거지, 냄비 닦기, 음식 준비 등 여러 가지 일을 나눠서 진행했다. 그러나 설거지를 마칠 때쯤, 우리는 이미 지쳐 아침 일과가 마무리되면 잠시의 여유를 찾기 위해 TV 앞으로 모여 할머니와 함께 아침 방송을 보며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TV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휴식처럼 느껴졌고 그 속에서 잠시나마 일상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속되는 일상 속에서 그 휴식의 시간이 슬슬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답답하고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무언가를 배우거나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저 화면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곧 이어 다시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다시 한번 주방에서는 냄비와 팬의 소리가 들려왔다. 점심밥을 준비하고, 먹고, 청소하는 루틴은 우리에게 피로감과 우울감을 주었다. 매일 매 시간 밥을 짖고 반찬을 만들며 한결 같은 일상 속에서 무언가 변화를 기대하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점심식사 후 청소를 하는 것은 거의 자동화된 작업처럼 느껴졌다. 방문 닫기, 창문 열기, 청소기 돌리기 등등... 이 모든 작업들은 나와 엄마 그리고 동생에게 너무도 많은 감정적, 육체적 에너지를 소모시켜주었다.
청소 후 할머니와 다시 TV를 보며 오후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TV 앞에서의 그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면서, 나는 그 속에서의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삶의 여러 가치와 경험,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저 TV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불만족감이 커졌다. 그것은 마치 산송장 같았고 삶의 소중한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멍하니 무슨 내용의 프로그램인지도 모르는 TV를 보며 그저 시간이 하염없이 지나가길 기다리다 이내 저녁이 되면 다시 한번 밥을 차려야 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요리 과정이었지만, 그래도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그리고 내 자신을 위해 계속해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버텨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체력적, 정신적으로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지친 마음을 잠시 뒤로하고 할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의 어린 시절, 할머니의 주방에서 퍼져 나오는 음식의 향기는 나의 하루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 따뜻한 추억의 음식들은 나의 어린 시절을 달콤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할머니가 지금은 아이와 같이 변해 있어, 이 상황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더 이상의 할머니가 아닌, 언제 성장할 지 모르는 아이로 바뀐 그 모습을 보며, 내 심장은 무겁게 느껴졌다. 그 변화 앞에서, 나는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해 나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리고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할머니를 돌보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취업준비생이고, 시간이 흘러 나이는 먹어가는데 나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야 만 한다는 그 부담감이 나를 점점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할머니를 보면서, 나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깊게 인식하게 되는것 같다. 나에게 사랑을 주던 내가 의지했었던 그런 할머니가 이제는 나에게 의지하며 살아가야 만 한다. 이런 변화는 동생과 나의 인생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순서와 역할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을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 강함의 한계를 체감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의 정신적인 한계와 부족함이 느껴져 내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특별한 존재였던 할머니가 지금은 '짐'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내 생각이 정상인지 의문이 들었으며, 어쩌면 나 역시 비열하고 간사한 자신의 엄마를 버릴 수 있는 '박일섭'과 같은 사람이 될까 두려웠고 이런 생각과 감정들로 인해 나의 한계와 부족함을 깊게 인식하게 되어 고통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