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된 듯한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언제 또 어리광을 부려보겠나 싶었달까.
어릴 때만 해도 아프면 학교에 안 갔다. 하루 이틀 빠진다고 큰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수업 못 들은 건 친구한테 공책 보여달라 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어른이 되니 아픈 건 내 손해였다. 대학에서는 이유 불문 결석은 결석이었고, 회사에서는 아프다고 빠지지도 못했다. 너무 몸이 아파 주어진 일을 하지 못했다면 그 공백을 메꾸는 것 역시 내 책임이었다. 그게 어른의 무게였다.
그런데 상담을 받기 시작하고 내가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권위자(?)에게 이해받게 되자, 갑자기 지금 눈앞에 있는 모든 일을 다 무시해버리고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잠깐 어리광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내가 지금 아프다는 걸 적어도 선생님은 알아주니까… 하는 생각.
다행히 상담사 선생님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질문과 피드백은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상담실만 들어서면 이제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 같았다. 선생님이 건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처럼 내 몸에 묵직하게 들이닥쳤고 나는 마치 전신을 포위당한 사람처럼 고분고분 대답했다.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도 때때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떤 상담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다. 나는 신뢰할 만한 상담사를 만났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새로운 일을 도전해보고 싶었다. 내가 왜 그걸 해보고 싶은지, 그게 왜 나랑 잘 맞다고 생각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1시간 상담이 끝난 후 선생님은 ‘지금 준비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걸 선택에서 그 뒤로 스스로를 숨겨버리고 싶은 건 아닌지’ 다음 시간까지 고민해보라고 숙제를 내줬다. 선생님은 내가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는 종류의 사람 같다고 했다. 조금은 매정한 선생님의 반응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의 말이 맞은 것 같기도 했으니까.
불편하지만 열심히 고민했다. 언젠가는 고민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게 어른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1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자면서도 생각했다. 꿈에도 나왔다.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해서 결론을 내리고 공책에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빼곡하게 적었다.
방학이 끝난 초등학생처럼 선생님에게 쫄래쫄래 가서 숙제 검사를 받았다. 저 선생님을 설득시켜야겠다는 이유모를 열정이 불타올랐다. 어쩌면 웃기는 일이었다. 어차피 내 인생인데... 열정적으로 내 인생에 대해 반박하는 나를 보며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제 말을 곱씹으면서 화가 나지는 않았나요?”라고 물었다. 이 질문을 듣고 나는 바로 알아챘다. 선생님은 애초부터 내가 어떤 답을 내리든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내 답이 YES이든, NO이든 그건 내 인생이다. 다만 선생님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내려보게 만드는 걸 숙제로 냈을 뿐이었다. 조금 허무했지만 괜찮았다. 내 안에 고민했다는 감각이 살아있고 결론을 내렸다는 뿌듯함이 있었으니까.
다음 숙제는 ‘계획표 짜기’였다. 이게 무슨 진짜 초등학교 방학숙제 같은 말인가 싶기도 했지만, 나는 또 열심히 해갔다. 선생님은 기간을 정해 놓고 나에게 계획을 짜라고 요청했다. 꿈을 구체적으로 그리라는 뜻이었다. ‘될 때까지 하라’가 아니었다. 언제까지 무엇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계획하라고 했다.
이번에도 선생님은 내 숙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상담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알았다. 아, 그냥 나한테 계획을 짜라고 하신 거구나. 선생님이 내 계획을 굳이 검사할 필요는 없구나.
어떤 일을 고민하고 결정할 때 누군가 나 대신 책임을 져주었으면 좋겠고, 내가 가는 길을 허락해주면 참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몸은 어른인데 정신은 아이로 남고 싶은, 회귀본능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누구의 허가를 받고 움직이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고 결정한 뒤에 책임을 져야 한다.
앞으로 닥칠 일이 조금 아득하게 느껴진다. 직업을 구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만일 내가 결혼을 한다면? 혹시 아이가 생긴다면?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사람들이 왜 어릴 때가 좋다고 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아직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무섭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때도 정해진 기한 안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만사 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계획표를 짜 볼 지구력이 남아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 힘을 갖게 된 것 같아 조금은 든든하다. 내 인생을 남에게 변명할 필요는 없다. 남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다. 자기 확신. 내가 선택한 길로 일단 go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