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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아 Aug 24. 2020

H에게

H야 안녕. 난 너에게 편지를 쓰지만 이 편지를 전해줄 용기는 없어. 감히 내가 너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노라고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너를 만나고 나서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너를 생각했어. 집에 와서는 조금 울기까지 했어. 두어 번이나. 그런데 내가 어떻게 글을 쓰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오랜만에 널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뒤부터, 내가 약속 확인 카톡을 참 많이 보냈지. "7시 15분 맞지?" "홍대입구 맞지?" 하면서. 혹시 내 행동에 기분이 나빴을까? 그랬다면 미안해. 사실 나는 이제 네가 약속시간에 늦어도, 아무 말 않은 채 잠수를 타버려도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해. 어쩌면 그날 네가 안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거든. 혹시 나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미리 말해달라고 자주 카톡 했어.


그런데 나보다도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와있는 너를 봤지. 너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고, 내 책을 축하하는 카드도 쓰여 있었어. 난 너의 모습을 보고 울 뻔했어. 아니 사실 몰래 울었어. 장난스럽게 우는 척을 했지만 사실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고였어. 네가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점에 감동했고, 또 네가 나를 위해 선물을 사 왔다는 것에 두 번 감동했어.


너는 나에게 참 어려운 친구였어. 어렸던 나는 네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 네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말이야. 너를 부담스러워만 했었나 봐. 그래서 네가 날 찾을 때 피했고, 필요로 할 때 숨었어. 그래서 너무 늦었나 봐. 정작 네가 어둠 속을 헤맬 때 난 네 곁에 있어주지 못했잖아.


차분한 네 모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식당에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때문이었을까. 난 너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싶어 졌어. 그때는 참 미안했다고. 그때 나는 참 어렸다고. 너를 소중히 여긴다고 말만 하고 너를 돌보아주지 못했다고. 선뜻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네가 먼저 네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더라. 요즘 상담도 잘 받고 약을 잘 챙겨 먹는다고. ‘어쩐지 조금 차분해진 것 같다’, ‘좋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마음이 엄청 시렸어. 네가 약을 먹었기 때문에 차분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널 만나고 돌아와서 요 며칠간 내가 무의식 중에 이런 말을 자주 하게 되더라. 바로 “사람은 참 작은 것에도 힘을 얻어”라는 말이야. 그해 여름, 나는 네게 연락한 것을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꼽을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어둠 속을 헤맬 때. 평소에는 네 생각을 하지도 않다가 희한하게 그때 네가 떠올랐으니까. 어머니에게 문자를 드리고 어머니와 통화했었어. 어머니는 네가 많이 아프다고 하시더라. 그 문자를 받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말도 하지 않고 밖에 나가지도 않는 네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았어. 너 진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흥이 넘치는 아이였잖아. 근데 왜 그랬을까? 그때 많이 기도했어. 하나님, 부디 제 친구의 마음을 위로해주세요. 부디 힘을 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더라.


카페로 자리를 옮기니 네가 그날들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더라. 그때 나의 연락이 네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 지를. 그 문자 한 통이 너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너는 미소를 지으며 그런 말을 했지만, 난 그 말이 맴돌아서 자꾸 눈물이 났어. 내가 뭐라고. 그깟 문자 한 통이 뭐라고. 그게 뭐라고 살아갈 힘이 난대? 그런 거 백 통도 더 보낼 수 있는데. 그렇게 네 마음을 만져줄 수 있던 것을 난 왜 몰랐을까. 밥 먹을 때 너에게 밥 잘 먹으라고 문자하고, 잠자기 전에 잘 자라고 문자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잘 잤냐는 문자, 백 통 아니 삼천 통도 더 보낼 수 있었는데.


1학년 때 우리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서로 시도 써주고 그림도 그려주면서 놀았지. 너는 내가 아는 친구들 중 가장 다재다능한 친구야.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고 노래도 소름 돋게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게다가 말도 참 잘하잖아. 그런 네 모습이 그리워. 그날 나는 네 차분한 모습이 아팠어. 날아다니면서 무대 위에서 춤추던 그때 네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 네가 다시 무대 위에 올랐으면 좋겠어. 겨우 문자 한 통으로 널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널 혼자 내버려 두지 말걸. 미안해. 너는 네 탓을 할 리 없지만 나는 그날의 내가 후회스러워. 너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


네가 다시 노래하길 기도할 거야. 네가 다시 무대 위에 오르길 내가 간절하게 기도할게.

안녕. 이제 널 놓치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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