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자전거 여행은 불편함을 넘어서 고생이었다. 자전거 여행이라 낭만적이라 말하긴 쉽지만, 이상과 현실은 사뭇 달랐다. 이든이 자전거 여행을 매년 여름 떠났던 이유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느껴지는 단단해진 마음이 좋아서였다.
그는 익산역 광장에서 민주를 만나 무궁화호에 자전거를 싣고 구례역으로 출발했다. 첫날 여행지는 지리산 성삼재를 거쳐 정령치를 다녀오는 코스였다. 성삼재는 지리산 주 능선의 봉우리 중 하나로 구례와 남원시 산내면을 잇는 도로의 가장 높은 곳이었다.
둘은 같은 디자인의 노란색 반바지와 흰 티를 맞춰 입었다. 민주는 커플룩 이랬고 이든은 살기 위해 자동차 운전자들의 눈에 잘 띄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머리에 손수건을 돌돌 말아 묶으면 얼굴로 흘러내리는 땀을 흡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자전거 짐칸에는 배가 불룩하게 불러있는 배낭이 묶여 있었다. 생약반 '팜피플'이라 적힌 작은 삼각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지리산 천은사 입구로부터 약 10km를 올라가야 해발 1,090m 성삼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도를 살펴보니 정령치에 오르려면 성삼재에서 뱀사골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달궁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올라가야 했다. 약 6km 정도 올라가면 해발 1,172m에 위치한 정령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든은 해발고도가 높은 정령치에 먼저 오르기보다는 성삼재를 거쳐 올라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성삼재에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도로 폭이 좁았다. 굽은 도로와 급경사에 대형 덤프트럭까지 많이 다녀 위험했다. 트럭이 지날 때마다 순간적으로 자전거가 중심을 잃고 트럭 쪽으로 비틀거리며 빨려 들어가려고 했다. 공기터널 현상이었다. 이든은 자전거 여행이 처음인 민주가 걱정되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한낮에 강렬한 태양 아래 달궈진 아스팔트 위 열기와 성삼재를 향해 올라가는 차들과 휴게소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자동차가 엇갈리며 내뿜는 매연 탓에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자전거를 타고 천은사 입구에서 성삼재 휴게소까지 올라가는 데 2시간 40분이 걸렸다. 드디어 성삼재 전망대에 도착하자, 눈앞에 사방이 탁 트인 절경이 펼쳐졌다. 지리산 성삼재는 부끄러운 속살을 감추려는 듯 피어오른 안개에 잠겨 있었다. 이곳은 속세의 세상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이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근심이나 걱정, 불안과 초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주차장은 이미 수많은 관광객이 타고 온 고속버스와 자동차로 만원이었다. 더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였다.
정령치를 향하는 길은 성삼재까지 올라오는 길보다 오르막이 더 심했다. 두어 번의 평지와 내리막이 있었던 후 급경사가 나타나 더 이상 자전거를 타기에는 무리였다. 이든은 자전거를 멈추고 차도에 내려서 민주를 돌아봤다. 민주도 힘에 부치는지 저만치 아래에서 속도를 내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많이 남았을 때 험한 정령치를 먼저 오르고, 내려오는 길에 고도가 낮은 성삼재 휴게소에 들르는 코스가 나았네.'
그는 민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중간에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나기까지 둘은 자전거를 끌면서 걸었다. 나무 그늘로 자전거를 끌고 걸을 때는 그나마 더위를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굽이굽이 오르는 길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처럼 나무로 우거진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쉴만한 장소를 발견하고 이든과 민주는 잠시 물을 마시며 쉬기로 했다
"힘들지 민주야."
"네, 너무 힘들어요."
"내가 쉽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자전거 여행 떠난다고 매일 한 시간씩 자전거 탔던 게 도움이 됐어요."
이든은 배낭에서 얼린 생수를 꺼내 민주에게 건넸다. 시원한 생수를 마신 민주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선배, 이런 깊은 산속에 집 짓고 살면 참 좋겠다."
"보기만 좋지. 막상 살려고 하면 불편할걸. 그래도 지금 여기서 살라고 하면 그렇게 하고 싶다."
민주와 이든은 해발 1,172m에 있는 정령치 표지석 앞에서 나란히 자전거를 양옆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다른 자전거 여행객에게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부탁했다. 그녀는 이든의 팔짱을 꼈고, 그는 민주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그녀의 땀 냄새와 체취가 그에게 전해졌다. 이든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정령치에서 남원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다행히 차가 많지 않았다. 내리막길에서 바라보는 계곡의 경치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내리막길은 길고 구부러진 코너 구간에 U자 형태의 심한 급경사가 많았다. 이든은 브레이크를 잡느라 손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민주와 별 사고 없이 내려온 게 초심자의 행운처럼 느껴졌다.
이든과 민주는 남원 시내에 도착해 횡단보도에 나란히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그들 좌측 옆에는 퇴근길 만원 버스가 정차해 있었다. 한 남학생이 버스 창문을 열고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일행으로 보이는 여학생은 "잘 어울려요."라고 말하며 서 있던 남학생과 서로 찧고 까불었다. 이든과 민주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일주일간의 자전거 여행의 종착지는 고산 윤선도가 여생을 보냈다는 보길도였다. 민주와 이든은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야영하기로 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장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무더운 여름밤을 즐기고 있었다. 둘은 내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1시간 30분에 걸쳐 화흥포항으로 가서 여객선을 타고 최종 목적지인 보길도를 다녀오는 것으로 1주일간의 자전거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보길도로 직접 가는 여객선은 없었고 보길도와 보길대교로 연결된 노화도 동천항까지 가서 육로를 이용해 보길도로 들어가야 했다.
해송 방풍림에서 시작된 텐트촌은 백사장 중간까지 색색의 이끼처럼 피어 있었다. 백사장의 중간 정도에 빈자리가 있었다. 모랫바닥에 방수포를 깔고 텐트를 설치했다. 이후로도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바다로 뛰어들듯 텐트를 쳐 내려갔다. 이든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무덥고 습한 바람을 마주했다. 이방인처럼 외로움에 떨지 않아도 좋을 여름밤이라 생각했다. 이루어본 적이 없는 단순한 열정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식혀주었다. 그는 맥주병들 주둥이 쪽에 노끈을 묶어 차례로 바다에 던졌다.
"그렇게 바닷물 속에 던져두면 시원해요?"
"시원하지. 낭만도 있고."
이든은 등대 불빛을 바라보며, 이제 내일 보길도 자전거 여행을 마치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산모기에 물려 붓고 가려운 건 참을만했다. 강한 자외선에 노출된 피부는, 특히 뺨에, 버짐이 피듯 하얗게 일어나 볼썽사나웠다.
"이제 좀 시원해졌겠지?"
"제가 꺼내볼게요."
민주는 노끈 줄을 잡아당겨 맥주 한 병을 꺼냈다. 그녀는 맥주병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정말 시원해요."
그는 맥주병을 따서 두 개의 종이컵에 맥주를 가득 채웠다.
"고등학생 때, 아빠와 강에 막둥이 낚시를 간 적이 있거든. 그때 아빠가 이렇게 마시더라고. "
"망둥이요?"
"갯벌 속에 사는 짱뚱어처럼 생긴 앤 데. 참, 짱뚱어를 모르겠구나."
민주는 맥주 한 컵을 금세 비웠다. 이든은 그녀의 잔에 맥주를 다시 채워줬다. 종이컵 위로 맥주 거품이 흘러내렸다.
"낚시를 다 데려가시고 되게 자상하시다."
"너희 아빠는 어떠신데."
"울 아빠는…. 좀 가부장적인 편이세요. 고집도 세시고."
"부모님들이 다 그러시지."
그가 자신이 마시던 빈 종이컵에 맥주를 따르려고 하자 그녀는 얼른 맥주병을 붙잡았다.
"옆에 이런 미녀를 놔두고 혼자 자작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우리 아빠도 잔소리 심하셔. 내년이면 졸업반인데 자전거 여행 떠난다고 일장 연설을 하셨거든."
"엄마나 제가 말대꾸하는 걸 특히 싫어하세요. 망둥이 낚시 얘기나 더 해줘요."
이든은 편의점에서 사 온 오징어 땅콩과 마른오징어 포장지를 열어서 봉지째 바닥에 내려놓았다.
"별로 재미난 얘기는 아닌데."
"그건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샤리아 왕이고 선배는 천일 야화를 들려주는 페르시아 재상의 딸 셰에라자드가 되는 거예요. 제가 졸려서 그만할 때까지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세요."
그는 배낭에서 무릎담요를 꺼내 그녀의 어깨에 둘러줬다.
"들려주기 싫다면?"
"확 선배를 덮칠 거예요."
민주가 두 손을 갈퀴처럼 세우고 까르르 웃었다.
"원래 반대로 돼야 하는 거 아닌가."
이든은 민주의 머리를 '콩' 소리 나게 쥐어박았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망둥이 낚시는 말이야."
주변 텐트에 랜턴이 하나씩 꺼져갔다. 깊은 밤, 빛을 잃어가던 해변은 별빛과 등대의 불빛이 가져다주는 아늑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제는 내일 화흥포항에 여객선을 타기 위해 잠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이든의 어깨 위에 민주의 고개가 떨궈졌다. 그녀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민주야, 이제 들어가서 자야겠다."
"너무 졸려요. 너어무."
민주는 연신 하품을 하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든은 빈 술병과 안줏거리, 과자 봉지들을 쓰레기봉투에 넣어 묶어두었다. 바람이 좀 더 불기 시작했고 먼 바닷가는 모래사장 주변의 빛이 사라지면서 꽤 어두워져 있었다. 해변에 들이치는 파도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는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잠이 먼저 깬 건 이든이었다. 텐트 바닥이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피곤한 나머지 밤사이 바닥에 실례를 했을까 봐 당황했다. 텐트 천정에 달아놓은 랜턴의 불을 켰다. 발포 매트 위에 침낭이 젖어 있었다. 텐트 출입문 지퍼를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앞쪽에 자리 잡았던 텐트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발밑에 파도가 들이치기 시작했다. 이든은 텐트 안으로 돌아가 민주를 흔들어 깨웠다.
"민주야, 얼른 일어나 봐."
민주는 잠이 덜 깬 상태로 랜턴 불빛에 눈이 부신지 눈을 뜨려고 애쓰면서도 한편으로 찡그렸다.
"지금 오랄 테스트받아야 해요?"
'생약반 OT(오리엔테이션)에서 구두시험을 보는 꿈을 꿨나 보네." 이든은 그 와중에도 웃음이 배시시 흘러나왔다.
"아니야. 태풍이 오려나 봐."
눈앞에서 들이치는 파도는 모래의 성을 허물며 자신의 욕망을 꿈틀거렸다. 뒤돌아보니, 사라진 텐트들은 모두 해변 백사장에서 철수해서 해송 방풍림 주변으로 후퇴해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야박해요. 우리 깨우지도 않고."
민주는 텐트 안에 짐을 구겨 넣으며 서운한 내색을 했다. 이든은 텐트에 묶어놓은 자전거 체인 자물쇠를 풀고 텐트를 해체해서 팩에 넣었다. 배낭을 꾸리는데 채 오 분이 걸리지 않았다.
"잠결에 바다로 떠밀려 갔으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우리 운이 좋았어."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녀의 놀란 마음을 위로했다.
'조금만 지체했다면 텐트가 파도에 휩쓸려 갈 상황이었는데, 얌체처럼 자기들만 가버린 건 인정머리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