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미건조한 두 번째 관람평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포스터만 보고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난해하다 말했다. 그리고는 곧 극장에서 내려졌고, 한 발 늦어버린 나는 결국 어느 심심했던 날 침대에서 혼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느낌 있는' 영화였다. 색감도 음악도 사람들을 홀릴 만큼 아름다웠고, 내용은 독특하고 난해했지만, 따뜻했다. 몽환적인 배경에 매력적인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가 더해져 나의 감각들을 찬찬히 깨워주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나의 머릿속 어딘가에 은은하고 붉은 잔상으로 남게 되었나 보다.
첫 번째 감상이 온전히 감각과 로맨스에 치중했다면, 두 번째인 이번 관람은 다소 이성적인 접근이었다. 사실 나는 영화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일도 어지간해서는 없다. 그런데 최근에 이 영화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 다시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우습지만 그 계기는 '블루투스 이어폰'이었다. 애플이 '에어팟'을 처음 내놓았을 때, 우리가 그 존재를 얼마나 비웃었는지 잊은 사람이 있을까. 그 요상하고 불편해 보였던 물건은 불과 3년도 되지 않은 지금 보편화되었고, 심지어 나조차도 무선 이어폰을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2013년 그 영화 속에서 모두가 조그마한 것을 귀에 꽂고 혼자 중얼거릴 때, 그때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줄 알았다. 영화가 개봉한 지 3년이 지나자 그것은 현실세계에 처음 등장했고, 또 3년이 지나자 '보통의 것'이 되었다.
어쩌면, 이 영화 속의 다른 모습들도 머지않은 미래에는 보통의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생겼다. 그래서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훔쳐보는 듯한 기분으로 이 영화를 다시 틀었다. 그리고 한 장면 장면이 더 이상 상상에만 머물러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전 부인과 많은 것을 공유하며 성장해왔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조금은 유약한 그녀의 모습을 완전히 감싸주지 못하고 결국에는 이혼에 이른다. 그리고 그 자리를 완전히 메워주는 존재는 컴퓨터 OS인 사만다이다. 사만다와 사랑을 키워나가는 과정은 그녀(?)가 단지 컴퓨터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것을 순간 잊게 될 정도로 따뜻하게 그려진다. 컴퓨터와의 사랑이 전혀 이질적이지 않게, 그저 SF 영화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한편으로는 남의 감정을 전문적으로 대필해주고, 사람 간의 소통이 지극히 제한되며 무미건조해 보이는 이 세계 속에도 인간의 감정들이 힘겹게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음을 발견했다. 대필된 편지를 통해서도 감동을 느끼고, 어플을 통해서도 사랑을 나누며, OS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위안을 받는 모습을 보면 마치 사막에 피어난 한 떨기 꽃을 보는 것 같다. 인간의 감정은 여전히 살아있구나 하는 희망의 불씨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래서 결국에 남는 것은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만 남은 것일까. 사람이 버려진 것일까.
+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나는 잡다하고 엉뚱한 몇 개의 랜덤 한 질문을 갖게 되었다(아무말대잔치)
Q. 사람은 결국 사람보다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컴퓨터에 의지하게 될까?
- OS가 떠나자 전 부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 인간 친구를 다시 찾아가 위로받는 모습을 보면 결국 사람을 채워주는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로 귀결된다.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컴퓨터이지만, 컴퓨터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도 결국에는 사람이다. 일방적 의지보다는 공존하는 세상이 아닐까.
Q. 영화에서처럼 인공지능과 감정을 교류할 수 있게 된다면, 인류는 멸종하게될까? 혹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번식을 이어나가게 될까?
- 실제로 인간이 아닌 존재와 사랑에 빠진다면 사랑의 결실 중 하나인 번식은 불가능해지고, 그대로 인류는 멸종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인류는 그대로 사라지게 되는걸까? 혹은 '번식'이 사랑과는 별개가 되고 그 자체의 목적을 가지는 행위로 분리되는 것은 아닐까.
Q. 인공지능의 영역이 사람 그 이상으로 커졌을 때도, 여전히 그것을 컴퓨터의 일부로만 여겨야할까?
- OS랑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라면, 컴퓨터는 여전히 고철덩어리에 불과한 걸까? 아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예 다른 영역이 열릴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공지능의 인권(?)을 주장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