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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윤아 Nov 01. 2023

“서운하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고 끊음에 자신만의 룰이 확고해지는 나이가 됐다. 새로운 관계를 맺을 기회도 별로 없을뿐더러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열정도 사라지는 나이. (내가 내성적인 성향이기 때문에 더 그런 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계를 끊는 행동은 더 확실해지는 나이다. 맞지 않는 사람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라면 오래 고민하지 않고 멀어지는 쪽을 택한다. 요즘 말로는 손절이라고 한다지.


오랜 친구인 A와 B가 있다. A는 둘 사이에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곧바로 불만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고 B의 마음도 헤아려보다가, 말해야겠다는 결론이 서면 그때 말을 한다. 그래서 속으로 삼키는 일이 왕왕 있다.


B는 자신의 감정에 즉각 반응해서 그때그때 서운함을 말한다. 그래서 B는 A의 패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좋지 않은 감정을 담아두는 것도 기분이 나쁘고, 나중에 이야기하는 것은 B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본인을 위한 거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B는 전후 상황을 듣지 않고 말이 앞서고, A가 일을 크게 키웠다는 결론을 내서 서로 더 감정만 깊어진다.


A는 B의 패턴을 힘들어하고, B는 A를 이해할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른 둘은 평행선을 걷고 있다.


사실 내 이야기다. 내가 쓴 갈등과 관계에 대한 글을 읽은 사람은 내가 어느 쪽인지 알 것이다.


자기 연민이 강하다는 말을 들었다. 되돌아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뭔가 마음에 걸려 내려가지 않으면 그 문제에 대해 계속 곱씹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 그러면서 자기 연민에 빠졌던 걸 인정한다.


하지만 자기 연민이 정말 나쁜 건가. 상대가 던진 말에 확대해석을 하게 되는 것도 나의 패턴일까. 생각이 다르면 서로의 상황을 인정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어쩌면 서로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손절이 쉬운 나이지만 아직은 이해하려고 노력할 여지가 있다는 게 다행이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관계는 그마저도 하지 않을 때니까.


오늘도 슬기로운 인간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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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하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슬프거나 행복한 것보다 훨씬 감정을 전달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상대에게는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상대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예민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런 것들을 이겨내고 누군가에게 서운함을 토로할 때는, 관계가 뒤틀어지지 않을 수 있을 때도 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그조차도 하지 않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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