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가 떠난 후 1년, 그래도 우리는 별을 바라본다.
강아지가 떠난 지,
일 년하고도 세 달이 지났다.
일주기에는 말순이의 극락을 빌며, 다시 전등사를 찾았다.
여러 종교 중 절을 고른 건,
어떤 형태로든 다시 태어날 수 있으리란 희망 때문이다.
내 강아지가 다음 생에는,
기다림 없이,
스스로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혹은 극락으로 가 왕생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선택할 수 있기를.
그리고 만약 다시 강아지로 태어난다면,
부디 나에게는 오지 않기를.
이전보다 애써 더 잘해주겠지만,
나는 여전히 한 생명의 행복을 전부 쥐기에는
단단하지 못하다.
전등사 안은
수많은 등불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그 불빛 아래에서
가족의 건강을 빌거나
이별을 조심스레 기도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속세와 가장 먼 곳에서,
속세에 가장 가까운 마음을 꺼내 놓았다.
가득 찬 등불은
마치 우주를 흘러가는 별들처럼 반짝였다.
거대한 소망은
부서진 파편처럼
일순간 빛나고 흩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찰나의 빛을 품어낼 것이다.
일 년은 길다.
하지만,
17년을 함께한 시간에 비하면
슬픔을 견디는 데 걸린 일 년은
서글플 만큼 짧았다.
벌써 울음을 참아내다니 너무 짧은 거 아냐?
미안할 뿐이다.
우리 가족은
강아지를 떠올리는 순간
말이 줄고,
울음을 삼킬 때도 있지만,
예전처럼
길을 걷다 울고,
샤워를 하다 울고,
밥을 먹다 생선가시를 발라내다 울지는 않는다.
이따금
그 아이의 옛날 영상을 보며 웃고,
닮은 강아지들의 웃긴 모습을 보며 웃기도 한다.
아마 우리 강아지도
어디선가 별의 파편이 되어 흩날리고 있겠지.
그 별이 반짝일 때마다
우리도, 그렇게 문득 웃는다.
마음은 단칸방 같다고,
어지러워지기 전에
서랍장에 차곡차곡 정리해야 한다는 김창완님의 말을 떠올린다.
그동안 슬픔이라는 서랍 안에
조심스레 강아지에 대한 기억들을 담아두었지만,
이제는 눅눅해지기 전에 살며시 꺼내어
햇살 아래 바짝 말리고,
다른 서랍에
천천히 옮겨둘 때가 되었다.
아마 그 서랍은
내 들숨과 날숨마다
열리고 닫히고를 반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