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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키, 지구의 시간을 알려줘

연극in 웹진 189호 하반기 기획 연재분

by 새벽의맑음

어둠과 적막이 감도는 밤을 지나 달도 꾸벅꾸벅 조는 새벽 어스름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 작업을 하다 보면, 슬쩍 나에게 다가오는 소리가 있다. 타닥타닥타닥, 마루와 작은 발톱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탈탈탈탈탈탈, 잠을 깨려는 듯 몸을 터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는 내 발밑에 턱 하니 멈춰 선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안 자냐”

고 나를 재촉한다.

때로는 가장 좋아하는 토끼 인형을 내 발밑에 무심하게 던지며

“좀 쉬고 해라.”

하고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그럼 그때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새 밝아진 창밖을 한 번 쳐다본다.

그렇게 나는 아침이 왔음을 알아챈다.


75656194-ad5a-4016-b5e7-c4ae57de02b9.jpg 산책하는 수키


수키는 4년 전 가을 내게로 와, 내가 알지 못하고 의미 없이 흘려보내던 지구의 시간을 알려주었다.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이 어두워질 때가 아니면 기상 예보는 보지 않던 내가 매일 아침 날씨를 확인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실내 배변을 절대로 하지 않는 수키의 성향 탓에 나는 하루에 두 번에서 네 번까지도 산책을 해야만 하기에 오늘은 언제 비가 오고, 눈이 올지, 언제 가장 더울지, 추울지를 확인하였고 그렇게 나는 하늘과 더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물론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춥든, 덥든 산책하러 나가야만 한다. 추워서 안 나가고, 비가 와서 안 나가고, 그런 건 이 강아지의 견생(犬生)에 있을 수 없다. 그저 나에게 오늘의 추위와 어제의 추위가 어떻게 다른지 그것에 대한 대비만 있을 뿐이다.


하루에 여러 번 같은 길을 걸어도, 매 순간 다른 점을 발견해서 냄새를 맡고 확인해야 하는 수키 덕분에 나는 땅에 무엇이 떨어졌는지, 땅의 계절은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떤 사람들과 어떤 작은 생명들이 이 길을 걸어갔는지 그 시간들을 쫓게 되었다. 워낙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안 나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안 가는 내가 수키가 온 이후론 매일 빠짐없이 외출하게 되었다. 이젠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에도,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에도 걸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거리낌 없이 나간다. 그러다 술에 취해 길바닥에 납작하게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고,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 엉덩이에 코를 갖다 대며 반가운 인사를 하려는 수키 덕분에 우리 함께 얕은 화단에 옮겨주며 어설픈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앞만 보고 걷던 나는 그렇게 땅과 더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수키를 키우기 전엔 미처 몰랐다. 이 지구가 시시때때로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음을.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커다란 계절 하나가 변화하는 것임을. 수키가 오기 전엔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내일인지 그 경계를 알 수가 없었지만 이제 수키를 통해 오늘과 내일 사이에 틈을 찾는다. 매일 아침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고, 매일 다른 땅을 밟는다.


인간의 1년이 강아지의 7년과 같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수키는 단 1분 1초도 허투루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잠시 눈감고 지나치면 너무 많은 것들이 변화하기 때문일까. 아주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우고, 냄새를 킁킁 맡고, 다가가 슬쩍 핥아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내 눈을 한번 슬쩍 올려다보며 이야기한다.

“이 풀 어때? 어제랑 다른 풀이야.”

“오늘 바람 냄새가 정말 좋아, 바람결에 순대 냄새가 나!”


11cf98fc-21b3-4de8-ba96-ce751c49bcf6.jpg 가끔은 연습중에 난입하기도 한다.


수키는 기회가 되면 종종 나와 공연 연습실에도 함께 다닌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대사를 내뱉거나, 알 수 없는 몸짓을 하는 배우에게도 놀라거나 짖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을 다 이해하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집중하고 귀를 쫑긋대고 고개도 갸웃거리고, 그러다 지루한 장면에선 가감 없이 하품을 쩍쩍한다. 나를 기다려야 하는 그 길고 지루한 시간에도 매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하며 충실히 살아내고 있다.


어느덧 4년이 흘렀다.

아직은 어리지만, 새끼 강아지는 아닌, 이제는 기다림을 아는 나이. 나와 함께 할 그 짧은 산책을 위해, 빨리 흘러 귀하기만 한 그 시간들을 기다림으로 아낌없이 내게 내어주는 주는 아이. 매일 조금씩 지구의 계절이 변화하듯, 너무도 빠르게 견생의 시간이 쌓여가는 수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오늘과 내일 사이의 틈에서 다짐을 해본다.


오늘은 어제보다 1초 더 수키와 함께 눈 마주치자고, 어제보다 1분 더 함께 하늘의 냄새를 맡고, 어제보다 10분 더 함께 땅의 변화를 발견하자고. 우리 이 하늘과 땅 사이에 오래오래 함께 더 머물자고.





본 글은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센터 연극in 웹진 189호 수록 기획연재로

폐간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발췌하여 브런치에 기록해둡니다.

연극in 웹진이 지속되길 바랍니다!


https://www.sfac.or.kr/theater/WZ020300/webzine_view.do?wtIdx=1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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