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곳의 얼굴을 마주 대했던 때는 2009년 1월이었다. 아주 늦깎이 유학생 신분이었다. 캐나다 밴쿠버 공항에서 유학비자 심사를 하고서 부랴 부랴 서둘렀는데 그만 살짝 늦었다.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데 난감한 상황이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유니폼의 사람들이 작은 비행기가 보이는 곳을 가리켰다. 문을 열어주어서 그냥 걸어 나갔다. 비행기가 보이는 활주로를 백 미터는 뛴 것 같았다.
15명 정도 타는 비행기에 이미 승객이 다 앉아 있었다. 여권 확인하고 작은 공간에 앉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30분 정도 후에 그 도시 빅토리아 city에 내렸다. 거주했던 순위로 서울 인천이 제1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그 도시 빅토리아가 나의 제2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다시 살고 싶은 도시였다. 언제나 그립고 마음 속에 여운으로 남아있는 곳이고 눈을 감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곳곳의 장소들이 나의 심장에 추억으로 남겨져 있는 곳이었다.
빅토리아 city를 버스 타고 유람했다. 시내의 대로에서는 아니었지만 버스가 가다가 사슴이 지나가면 세웠다. 나도 사슴들을 구경했다. 어떤 날은 사슴 가족이 지날 때도 있었다. 그 사슴들은 천천히 지나갔다. 나무가 많아서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그림 같은 모습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 도시의 대중교통 버스기사가 아주 친절했다. 모르는 길도 질문하면 알려주었다. 차를 세우고 커다란 지도를 펼치고 말했다. 스마일도 좋았다. 책임감도 투철한 버스기사였다. 그 버스의 티켓이 나의 교통수단이었다.
버스를 타고 30~40분쯤 가면 밴쿠버로 가는 그 유명한 B.C. Ferry 가 사람과 차를 운송했다. 멋스러운 항구가 인접해 있었다. 동화 속의 모습이었다. 개인 보트들을 정박해 두는 곳이기도 했다. 알래스카로 가는 크루즈가 승객을 내려주며 정박하는 곳이기도 했다. 또 시애틀로 가는 훼리 (Ferry)가 있었다.
그 도시 모습이 나의 마음을 붙잡았다. 중소도시의 면목을 보여주었다. 무엇인지 모르는 매력이 넘치는 곳이이였다. 캐나다이지만 영국의 은퇴자들이 와서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캐나다에서 날씨도 춥지 않은 도시였다. 은퇴 후에 살고 싶은 도시 중에 가장 인기 곳이라고 했다. 삶을 즐기기에 적합했다. 산책하기도 좋았다.
빅토리아 city의 Royal B C museum, 빅토리아city의 harbor에 멋진 배들을정박해 놓은 모습.
빅토리아 city에서 버스타고 가다가 볼수 있는 사슴
빅토리아city 국회의사당
부차르가든의 중심부에 위치한 정원
빅토리아 항구에는 늘 관광객이 있었다. 아무 때나 그 아름다운 항구를 볼 수 있었다. 그 거리를 산책하며 많이 걸었다. 그냥 걷기만 해도 보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얻었다. 그 도시 중심부에 국회의사당 건물은 마치 런던의 건물과 흡사했다.
2004년 런던에 갔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 앞에는 늘 관광객이 잔디와 의자에서 휴식을 취했다. 간단히 음식도 먹고 서로 대화했다. 화창한 날씨에는 여행자들이 더 좋아라 했다. 유명한 B.C 박물관도 가까이 있었다. 빅토리아 항구에는 예쁜 식당도 많이 있었다.
또한 알래스카로 가는 크루즈가 시애틀에서 출발 후에 정박하는 곳이라고 했다. 크루즈를 내려서 관광하는 승객들을 보았다. 대부분 은퇴 후의 여행인 것 같았다. 크루즈 여행자들은 아주 멋쟁이의 옷맵시, 스카프 그리고 함박웃음이 행복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캐나다인들과 대화해 보았다.
여행 중에 호텔에 묵으며 짐을 가지고 다니는데, 크루즈 여행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크루즈에 짐을 두고 정박하는 도시에서는 쇼핑과 관광만 한다고 했다. 크루즈 안에서 안락하게 잠을 자며 뷔페 식사를 충분히 한다고 말했다. 멋진 무대의 공연도 볼 수 있다고 얘기했다. 크루즈 여행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그 도시는 무엇이든 천천히 했다. 정원 일 꽃 심기도 아줌마 혼자 하는 걸 보았다. 지나가다가 보고는 Are you planting? 하고 물으면 웃으면서 Yes , of course. 하고 행복하다는 듯 대답했다. 햇빛이 많은 시간에 젊은 청년이 집 앞에 앉아 있었다. 햇빛과 휴식을 즐기는 모습도 보았다. 무엇이든 빨리하는 것은 없었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다는 한국분을 만났다. 그분은 빅토리아 city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도시는 중산층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고소득자는 거의 없는 편이라고 했다.
캐나다 동부에서 마켓을 운영하다 은퇴할 나이에 이 도시로 이사 온 할머니였다. 그분의 아들 딸들은 캐나다 동부에 살아서 서로 왔다 갔다 한다고 했다. 그 할머니의 집도 방이몇 개 있었다. 지하에 방이 2개 부엌 화장실 그리고 1층에 방에 3개 부엌 화장실이 있었다. 렌트비를 받고 유학 온 한국 학생들과 직장인들을 살게 했다.
4월이 되자 그 도시는 거리에 꽃화분을 매달기 시작했다. 아기자기하면서 향기 나는 모습이었다. 관광객들의 눈길이 멈춰있곤 했다. 거리 대부분에 꽃향기가 났다. 그 화분들을 관리하는 모습도 보았다. 빅토리아 city에서 부 차르 가든(The Butchart Garden)을 갈 수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방문하는 아름다운 드넓은 정원이었다. 유명하고 잘 알려진 곳이었다. 캐나다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손질한다. 꽃과 나무 가꾸기를 즐겼다. 일행을 바꿔서 그곳에 두 번 방문했었다.
그때 난 손수레로 흙을 실어 나르며 일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았다. 마치 로또 당첨된 것처럼 웃는 얼굴을 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일까? 원예전문가들은 일을 즐기면서 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정원을 훌륭하게 손질하는 일 그야말로 힘든 노동이었다. 그 후에 정원 일을 아르바이트하는 유학생이 너무 힘들다는 말을 하는 걸 들었다. 하지만 수입이 꽤 괜찮은 전문직이었다. 캐나다가 원예가 발달한 국가 중에 하나라고 들었다.
홈스테이집의 어느날 아침에 뒷마당 풍경
(TESOL 자격증 취득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었던 도시)
날씨는 비 오는 촉촉한 모습이었다. 홈스테이 집은 지하를 포함한 2층 집이었다. 2층 이래 봐야 계단 다섯 개만 오르면 되었다. 비 내리는 뒷마당이 보였다. 도착 날은 저녁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유창하지는 않지만 영어로 인사하고 의사소통도 가능했다. 다음날 아침 빅토리아 시내의 학교를 갔다. 일요일의 거리 모습을 보았다. 낯설지만 잠깐 보고 돌아왔다.
홈스테이 집은 캐나다인(canadian)이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잘 안 먹었다. 너 요리할 줄 아냐 하고 홈스테이 집 아줌마가 질문했다. 냄비나 부엌용품을 사용하라고 했다. 짐 가방 안에 챙겨간 고춧가루를 꺼냈다. 무하고 작은 배추를 사 왔다. 한국식 물김치도 만들었다. 그리고 무생채도 만들었다. 음식 만드는 걸 보고 홈스테이 아줌마가 감탄했다. 그 홈스테이 집 아줌마는 12살 딸 하고 살며 아들은 아빠와 같이 산다고 했다.
이후에도 홈스테이 집 음식이 안 맞아서 힘들었다. 다른 학생들도 대부분 불만이었다. 중국인 집에 홈스테이를 하는 학생은 음식 맛없고 집안 청소도 안 해서 지저분하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그곳에서도 뚜렷하지는 않아도 인종차별이 있었다. 대부분 임시로 주거하는 형태라서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성행했다.
월요일에 버스 타고 학교에 갔다. 빅토리아 city 중심가에 있었다. Business College 였다. TESOL 자격증으로 유명한 곳이라 했다. 나이가 제일 많았다. 모두들 20대 나 30대였다. 그런데 단체 어학연수생이 남미, 한국, 사우디에서 왔다. 유학원에 수수료를 가장 많이 주는 학원인듯했다. 이미 학생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의는 캐나다인(canadian)들이 했다. 한국 국내와는 조금 달랐다. 우선 사용 단어가 많이 달랐다. 교재를 대부분 프린트 물로 제공했다. 인쇄상태도 깨끗하지는 않았다.
학교는 ESL를 거쳐야만 했다. 토익이나 텝스 성적 없이 온 사람들은 TESOL 과정을 가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쉽지 않았다. 그냥 준비 없이 온 것이어서 후회도 했다. ESL를 들으며 시험을 보았다. 한번 떨어지고 또 준비했다. 캐나다인 대학생에게 튜터(Tutor)를 했다. 장소는 카페의 탁자에서 했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속도가 느려서 사용이 힘들었던 작은 노트북과 함께 했던 세월이었다. 딱딱한 의자와 컴퓨터가 숙제를 도왔다.
일주일 지나서 홈스테이 아줌마가 초대가 있다며 데려갔다. 그 초대는 학교 학부모 모임인듯했다. 캐나다인 집으로 초대해서 음식 접대하고 차 마시며 담소하는 걸 보았다. 물론 낯선 나하고도 친절하게 대화했다. 아주 크고 예쁜 집이었다. 넓은 거실에서 차려진 음식도 먹고 차도 마셨다.
한국인 어린 유학생의 엄마도 왔다. 아이들만 데리고 캐나다로 유학 온 엄마가 나한테 아이들도 같이 왔냐고 물었다. 군대에 갔다고 대답했다. TESOL 자격증 과정을 들으러 이 도시 빅토리아에 왔다고 했다. 나의 직업을 더 활용하려고 공부한다고 말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남미에서 십 대의 학생들을 인솔해서 온 큐레이터가 보였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 사람처럼 큐레이터에 관심이 갔다. 오전에 나타났다가 학생들이 강의실에 들어가면 돌아가는 듯했다. 단기 어학 연수생들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멕시코에서 와서 한 달가량 영어로 강의 듣고 돌아가는 단체 20여 명이었다. 그중 꽤 똑똑한 학생과 영어로 대화도 많이 했다. 남미로 돌아간다며 나에게 작은 목각 인형도 선물했다.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많이 섭섭했다.
다른 집에 초대 받아서 갔었을때 맥시코 학생에게 받았던 목각인형선물
빅토리아 city 학교앞 거리의 모습
학교에서 캐나다인 선생님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비 오는 빅토리아는 촉촉하고 공기도 좋았다. 나무가 아주 많았다. 상쾌한 냄새가 났다. 아침이면 버스 타고 학교에 갔다. 그 학교는 한국인 교직원도 있었다. 한국사람이 만든 College이었다. 교직원 사무실이 2개 있었다. 강의하는 캐나다인의 선생님 사무실과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한국인 교직원의 사무실이었다. 한국말은 그 한국인이 근무하는 교직원 사무실 안에서만 하도록 교칙이 정해졌다. 많은 학생들이 대부분 한국말로 대화하는 걸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자유롭게 오후를 보냈다.
그 20대의 학생들은 학교 끝나는 오후 2시 이후는 같이 어울려 다니며 놀았다. 영어를 더 배우러 온 학생들이 늘 한국말로 얘기하고 여기저기 시내로 다녔다. 어학연수 온 학생들의 커뮤니티는 한국 학생들과의 모임이었다. 스마트폰이 없는 시대였다. 그들은 거리에서 만났다. 서로 여행 정보도 교환했다. 동행도 했다. 그중에 십 분에 일은 어학연수 겸 다른 나라의 학생과 만나곤 했다.
유학이나 어학연수는 한국의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생활해야 했다. 그런 상황을 잘 못 견디는 학생들은 목적을 상실했다. 그 빅토리아의 거리가 모든 걸 껴안았다. 여행자나 어학연수생에게 포근하게 했다. 현지인들은 친절했다. 길 안내등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침에 버스로 학교에 갈 때 현지인들도 같은 버스로 출근했다. 여자들은 대부분 가방이 두 개였다. 한 개는 소지품 가방이었다. 다른 한 개는 도시락과 음료 등의 가방이었다. 물가는 한국보다 비쌌다. 패스트푸드를 제외하고는 거의 두배 정도의 가격이었다. 쉽게 식당을 다닐 수는 없었다.
두 달이 지나면서 그 도시를 많이 알게 됐다. 어느 위치에 무엇이 있고 한국 식당은 어디에 있는지 파악했다. 저녁 5시 이후는 거리는 한산했다. 모든 상가들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팝 (pub)이나 카지노(casino)를 제외하고는 밤의 문화는 거의 없었다. 그 시간은 패밀리 타임(family time)이었다. 가족과의 시간 활용을 많이 했다.
캐나다의 그 도시 빅토리아는 직장 생활하는 문화가 많이 달랐다. 같은 직장 동료들과 근무시간에만 협조하고 일했다. 근무시간 이외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일상이었다. 한국 국내의 퇴근 후의 화려한 불빛 조명의 밤문화가 발달된 도시와는 확연이 다른 세계였다. 어느 일요일 거리의 퍼레이드 행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의상을 차리고 참여하는 것을 구경했다. 얼마 후 퍼레이드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흩어져서 각자 바로 돌아가는 걸 보았다.
홈스테이 집에서 토가 파티를 했다. 낮시간 동안 집안에 풍선장식을 했다. 음식을 만들며 준비했다. 바비큐 숯과 구울 준비도 했다. 저녁이 되자 지인들이 하나 둘 왔다. 침대 시트를 옷 위에 장식으로 입고 왔다. 재미있게 음식 먹고 얘기했다. 춤도 추며 즐기는 문화였다.
토가 파티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 건너편 집 남자 유학생들이 침대 시트로 옷 위에 장식하고 왔다. 모두가 반겼다. 그 도시는 일단 파티를 열면 잘 모르던 사람들도 즐겁게 어울렸다. 이야기도 하며 춤도 추고 하는 걸 보았다. 홈스테이 집 아줌마는 스포츠 댄스를 아주 잘 추었다.
아이들끼리도 아주 재미있어했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은 뒷마당에 비가 촉촉이 내렸다. 학교 가는 길은 우산과 함께였다. 상쾌한 나무 내음이 났다. 학교를 마치고는 커피를 마시러 갔다. 커피는 투샷을 주는 짙은 원두였다. 반면 가격은 비싸지 않았다. 캐나다 달러로 2불 50 정도였다. 늘 양이 많다는 걸 느꼈다. 커피숍의 자리가 있으면 그곳에서 숙제도 했다.
몇 개월 후 TESOL 과정이 끝나고 자격증도 받은 후였다. 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않은 사람들에게 영어를 영어로 가르치는 자격을 취득했다. 빅토리아 대학( Victoria University )으로 옮겨서 더 영어강의를 들을 계획이었다. 그렇치만 치료를 위해서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몇 개월 동안 불편했던 왼쪽 어금니가 아프기 시작했다. 잘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캐나다는 의료비가 너무나 비싸다고 들었다.
많이 아파서 아스피린으로 며칠을 보낸 후에 빅토리아 대학( Victoria University ) 안에 치과를 찾아갔다. 치과의자에 앉았다. 간단한 진찰 후에 의사는 심각하다는 듯 말했다. 위에 잇몸이 많이 상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두 개의 어금니는 버티지를 못한다고 했다. 치료하자는 말은 안 했다. 유학생 인걸 알고는 더 이상의 안내는 없었다. 잇몸 시술비용이 팔백만 원 정도 했다. 비싼 치과 치료비를 어찌할 수 없었다.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아서 치료하기 위해서 한국의 치과를 예약한 후에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