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서
삶과 죽음의 간격
여의도와 용산을 이어주는 원효대교 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저녁 출퇴근길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지만, 그 다리 위를 지나가다 ‘내가 여기서 핸들을 놔버리거나 꺾으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살아가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봄직한 '힘듦의 연속'인 순간에.
흡사,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랗고 두꺼운 철벽 하나가 앞길을 꽉 막고 있어, 뛰어넘을 수도 깨부수어버릴 수도 없는, 바늘구멍 틈조차 보이지 않아 그저 막막함으로 몸서리칠 수밖에 없는 그런 힘듦의 연속.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명분도, 의미도 찾을 수 없었던 때. 나란 존재 자체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느꼈던 그 때.
그럴 때,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 종이 한 장 차이, 1/100초의 순간을 가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순간, 나란 존재는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을 테니.
떠남의 의미
예전 부서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의 부음으로, 묵직한 바위 하나 가슴에 얹은 채 보낸 하루. 장례식장으로 향하던 퇴근길, 막히는 도로 위에서 그저 깊고 깊은 한숨을 쉬는 것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3년 전, 내가 현재 부서로 발령받아 오기 전까지 그와 난 같은 팀에서 책상을 나란히 둔 채 1년 넘게 함께 일했었다.
우리 팀에서 목소리가 제일 컸고, 웃음소리가 가장 호탕했으며, 회식 땐 종류별로 맥주를 마시던 자칭 타칭 맥주 애호가였던 사람. 그런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한 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엷은 미소를 띤 예전 모습 그대로, 사진틀 속 화석이 된 그와 마주했다. 내 가슴 위 묵직한 돌이 나를 짓이겨 내리는 느낌이었다.
왜, 저기에 있나.
무엇이 그를 극한으로 몰아갔을까.
아무도, 그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수많은 억측과 의문투성이의 말만 오고 갔다.
벽에 기대앉아 멍하니 있던 그 시간들 속에서, 마지막으로 술잔을 마주쳤던 그날 그의 웃음소리,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날 그 목소리,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가며 인사를 나누었던 그 얼굴이 떠올라 먹먹함과 갑갑함이 목 끝까지 차오른 탓에, 가슴을 툭툭 내리 치다가 헛기침을 하고, 명치끝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다가, 그저 쓸데없는 얘기로 헛웃음을 웃다 말다 했었다. 사는 게 참, 부질없다 생각하며.
떠날 때 떠나더라도
체기가 가라앉지 않을 때처럼 불편한 속으로 돌아오는 길, 마알간 눈썹달이 낯선 초행길을 안내해 주던 그 밤. "눈썹달을 본 그 달은 무척 바쁜 달"이라고 했던 엄마 말씀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비루한 삶이어도 살아있으니 예쁜 눈썹달도 보고, 살아있으니 이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싶던 그 순간, 언젠가 이 곳을 떠날 때 난,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떠난 이유가 명료하면서도 작은 의미라도 부여될 수 있는 그런.
내가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누군가가 절실하게 살고 싶어 하는 하루라고 했다. 그런 이유로 내가 숨 쉬는 일분일초의 시간이 의미로울 수 있기를, 또 그 연장선 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땐 그 떠남 앞에 ‘의미’라는 말이 덧붙여질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지 못하는 답답함이나 갑갑함보다는, 내 삶의 흔적을 함께 한 이들에게 아련함과 애틋함, 잔잔한 그리움을 남기는 사람이면 좋겠다 싶고, 이름 석 자 남기진 못해도 지나온 길에서 향기가 나는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싶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이왕이면 살아가는 지금의 앞모습과 떠나는 그때의 뒷모습이 함께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길 바라본다. 주어진 시간을 보람되게, 알뜰하게 보내리라 스스로에게 작은 다짐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