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인연, 환생의 고리
Prologue
“지구 상에 그 하고 많은 나라 중에서도
대한민국,
그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ㅇㅇㅇ.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벌써 16년이 되었다, 이 영화가 나온 지.
나의 꽃청춘 20대.
그 시절, 말랑말랑한 내 심장에 꽂혀 한동안 머물렀던 마지막 대사.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난대도
결국,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 뿐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지녔기 때문이라죠.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다시 만나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때 난 그랬다.
누군가와 인연이란 걸 맺게 된다면, 이렇게.
누군가를 기억한다면,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이렇게 사랑하리라.
사랑 & 인연
1983년의 과거와 2000년 현재라는 시간의 틀 속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는 환생과 인연, 사랑에 대한 이야기.
‘번지점프를 하다.’
갑작스럽게 소낙비가 쏟아지던 여름날.
인우(이병헌 분)의 우산 속으로 뛰어든 마알간 얼굴의 태희(이은주 분).
그들은 대학 교정에서 만나 사랑을 시작했고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했지만, 예기치 않던 때에 헤어짐을 겪는다.
17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인우의 눈앞에, 성별만 다를 뿐 먼저 떠난 태희의 환생인 듯한 현빈(여현수 분)이 나타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현빈을 ‘태희’라 부르며 “왜 어째서 넌, 날 기억하지 못하니? 난 너를 이렇게 느끼는데, 널 이렇게 알아보는데..” 라며 안타깝게 울부짖는 인우.
현빈을 바라보던 인우의 눈빛.
혼란스러움, 극도의 그리움과 애절함, 극한의 간절함으로 미세하게 흔들리던 그 눈빛, 그 눈물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오래도록 그 인연을 기다리고 그리워한다는 게, 간절하게 보고 싶다는 게 저런 감정이겠지, 싶은 생각에 그 아픔이 고스란히 내게 전이되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20대의 내게 ‘개념적인’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뜨겁게, 절절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쳐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죽어서도 다시 태어나 그 인연을 이어가는 것.
지금, 충분히 나이를 먹은 내게 ‘실질적인' 사랑은 기나긴 인생길, 내 곁에 함께하는 동반자, 동지로서 그 어떤 순간에도 나를 믿어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절대적인 신뢰의 상징. 그렇지만 이번 생애 여기서 끝, 종지부를 찍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다시 찾아보며 한껏 설레고 눈물짓는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건, 살아온 세월만큼 그 시간만큼 사랑의 의미와 깊이, 범위 등 외연이 확장된 면이 있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사랑의 본질만큼은 크게 변함이 없다는 것.
내게 있어 사랑이란,
좋은 인연들과 함께 매 순간 행복하길 바라는 것.
내 인연들의 기억 속 자그마한 공간에 잠시 머무르는 것.
떠난 후엔 따뜻한 온기가 흔적으로 남는 것.
Epilogue
어느 때였나.
식사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이렇게 같이 점심 한 끼를 먹는 인연도 억겁 년이 지나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인연”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나와 연결된 모든 인연을 과감히 끊어내고 ‘해탈’ 하지 않는 한, 인간의 ‘관계’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돌고 돈다고 했다.
그런 탓에 조금은 뜬금없지만, 아주 가끔 문득, 내 눈 안에 필터가 있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좋은 인연과 악연을 알아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좋은 사람은 한눈에 알아보고 내 곁에 딱! 붙여놓고, 나쁜 사람은 뜰채로 뜨듯 싹 걸러 버릴 수 있게.
왜냐하면, 좋은 인연은 ‘널 만난 내 생은 '상'이었다(드라마 도깨비 中 대사)'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악연의 경우 ‘널 만난 내 생은 ‘벌’이었다’가 될 테니.
한번 사는 짧은 인생, 이왕이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서로 돕고 웃으면서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이 밤, 머리 끝 더듬이 한 쌍을 한껏 세우고, 좋은 사람들, 좋은 인연들의 주파수를 찾아 날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