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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에 새겨진 향기

-일상의 냄새를 인격의 향기로

by SeonChoi

캐나다 밴쿠버 바닷가인 이 곳은 여기저기 운동복 차림으로 뛰는 사람들 천지이다.


나는 농담처럼 숨쉬기 운동만 하고 산다고 말한다. 유일한 움직임이 산책이다.

바닷가를 끼고 커다란 늪이 있는 공원의 수풀 길을 천천히 걸어 다닌다. 걷다보면 온갖 자연의 향을 만난다.


살짝살짝 올라오는 바다의 내음, 유달리 오리가 많이 사는 물가이기에 뭉텅뭉텅 뭉쳐 날리는 오리 잔털의 냄새, 무엇보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흙에서 올라오는 냄새, 풀마다 꽃마다 뿜어내는 향기.


집으로 돌아와도 뇌 속에 남은 산책길의 온갖 자연의 향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를 밖으로 불러내곤 한다.


인간이 지닌 그 어느 감각보다 후각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 순간에 흩어졌다고 여기지만, 냄새는 강력하게 뇌에 자리를 잡는다고 한다. 삶에는 얼마나 다양한 냄새가 얽히고설키어 있는가.


여전히 코끝에 맴도는 냄새, 돌아보며 추억하는 일상은 냄새에 대한 기억이다.

은은했던 내 어머니의 분 냄새, 얼굴을 파묻고 맡던 치맛자락 냄새, 구수하던 할머니 냄새. 여전히 내 코는 어린 시절의 그 코에 머물러 있다.


강아지를 목욕시키면 주인의 이부자리 위에 온 몸을 비벼 대어 다시 제 몸에 주인의 냄새를 휘감고 나서야 안심한다. 강아지 마냥 나는 복작거리며 내 일상의 냄새를 온통 묻혀야 안심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집 밖의 분주한 도시의 인위적인 낯선 냄새를 털어내고, 익숙한 집안의 냄새 안에서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누리는 ‘집순이’였다.



최근 몇 년 동안 내 집에서 나던 그 익숙했던 냄새의 부재로 힘들어 했다.

아침을 열어주는 식탁 위에 내려져 있던 커피 향, 가방에 담고 출근하던 그 따뜻한 보온병의 부재.

책상 붙잡고 앉아 나쁜 머리를 탓하며 씨름하다 보면 문틈으로 들어오던 된장국 냄새의 실종.

손때 묻고 먼지 쌓여 함께 나이 들어가는 퀴퀴한 책 냄새의 상실.


사라진 냄새는 지속적으로 나의 내면을 황폐화시켰다. 벌써 여러 해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그 냄새와 분리되었지만, 나는 휘휘 흩어지는 매캐한 연기처럼 정착하지 못했다.



오늘 글을 뒤적거리는 가운데 조선의 선비들이 다가와 다른 향기를 가르쳐 주었다.

그들도 물론 자연에서 누리는 향기에 대해 참으로 많은 시들을 남겼다. 매화, 향나무, 난초, 풀 등의 향기를 삶과 엮어 노래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진지하게 칭송한 향기가 있었다.


“만세까지 전해지는 밝은 덕(德)의 향기”

“길이 남겨질 향기로운 이름”

“말의 향기”

“이름 석 자의 향기”


덕, 이름, 언어 등에 물리적 향기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향기야말로 직접으로 간접으로 멀리까지 퍼지고, 세대를 거쳐서까지 이어진다. 그야말로 많은 이의 코끝에 늘 맴도는 진한 ‘향기’이다.



나의 내면에 ‘덕’이라 부를 향기가 담겨 있는가? 내 이름과 말에서 퍼지는 향기는 어떠한가?

덕의 향기, 이름과 언행의 향기가 어찌 그리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이랴.


납작 엎드린 듯 지내는 시간을 통해 비로소 결핍에서 충만을, 부재에서 존재의 귀함을 깨달았다. 뇌에 새겨진 익숙했던 일상의 향기는 내 삶에 이미 충만함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황폐한 나의 후각이 맡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면이 결핍된 사람이 어찌 향내를 피워낼 수 있으랴. 내가 무엇을 잃고 얻고 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는가를 잡고 있어야 했다. 나의 내면을 나의 정체성으로 잘 채워나가야 했다.


이제 다시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한 시간 두 시간 자연의 냄새에 취해 산책을 다니려 한다.

선현들이 노래한 인격의 향기를 지닌 사람을 소망하고 지향하며 오늘도 걷고, 그리고 쓴다.



<향기>


나는 피워내리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소박한 이름의 향기를


나는 품어내리

어머니가 가꿔주신

선한 성품의 향기를


그리고

나는 또 남기리라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 사랑의 향기를


글/그림 Seo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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