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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Jun 30. 2021

농경인 DNA, 유목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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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성귀만 먹고 지낸다는 말은 매우 어려운 환경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우리말의 ‘푸성귀’는 한자로 나물, 풀 등을 의미하는 소(蔬), 초(草), 채(菜) 등이다. 대개 거친 밥과 짝하여 ‘거친 밥에 푸성귀만 먹고 산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난과 굶주림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이원익(李元翼)은 한성 사람이다. 선조 때 재상이 되니 세상이 그 현명함에 감복하였다. 광해군 때 직언으로 간하다가 쫓겨나 주의 앙덕촌(仰德村)에 거처하였다. 초가집에서 푸성귀에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태연하여  부귀하였던 적이 없는 사람 같았으니 지나가는 사대부는 반드시 그의 집에 예를 표하였다.

《동국여지지》 2


재상의 지위에 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매우 궁핍해졌음을 푸성귀와 거친 밥이 단적으로 말해준다.  백성들은 해마다 보릿고개에 이르면 푸성귀로 연명하며 버티어 내야 했다.


식구가 몇 안 되는 가난한 백성의 집에서 경작하는 전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일 년 내내 힘들여 농사지어 풍년을 만났다 해도 빚 갚고 세금을 내고 나면 뒤주가 이미 바닥나므로 매년 봄여름 사이에는 으레 푸성귀만을 먹어 뱃속이 텅 비는 어려움있습니다. 더구나 농사가 잘 되지 않아 평년작에도 미치지 못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조세를 내고 무엇으로 처자를 먹여 살릴 수 있겠습니까.

《동춘당집》 6


푸성귀만으로 견디어 내는 일은 이처럼 고통이었다. 그런데 다른 식재료와 어우러진다면 신선한 채소 자체는 아주 긴요한 먹거리이다.


이곳 캐나다는 저마다 정원을 가꾸는 일이 취미이자 의무인지라, 사람들은 대개 철 따라 꽃을 심고, 나무를 가꾼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국인 벗들은 무언가 먹거리도 꼭 심어 기른다. 고추, 파, 상추, 케일, 깻잎 등... 과장하면 손바닥만 한 땅만 있어도 푸성귀를 심어 거둔다. 그리고 나눠 먹으며 행복을 더한다.


가까이에 정원이 제법 큰 집에 사는 친구가 있다. 부부가 워낙 부지런해서 꽃나무는 물론 사과를 비롯한 과실수와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상추, 고추, 케일, 깻잎을 비롯한 온갖 작물을 기른다. 그 덕에 좁은 아파트인 우리 집 식탁에도 여름 내내 신선한 무공해 야채가 풍성하게 올라오곤 했다.


방문 조차 금지했던 방역지침이 완화되어 오랜만에 방문해보니 팬데믹 기간 동안에 집에 머물면서 정원이 거의 ‘농지’로 변해있었다. 농경인 DNA가 강해서, 정원이 아니라 아예 두 농부가 농지를 운영하고 있다고 농담을 건네었다. 정원이 부럽지만, 정원 넓은 친구가 있으니 감사하고, 가족이 그립지만 가족처럼 대해주는 벗들이 있으니 그것도 고맙다.


작물을 기를 환경도 능력도 없지만 나에게도 농경인 DNA인지, 한 곳에 뿌리내려 다시는 움직이고 싶지 않다. 잃은 뒤에야 깨닫는다더니, 어느 순간부터 삶이 마치 유목민이 된 것처럼 느껴지면서 생겨난 갈망이다.


나는 태어난 집에서 사춘기 무렵까지 성장하였고, 그 뒤로 한두 번 이사하고 결혼하였다. 결혼한 뒤에는 시댁에서 살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분가하여 내내 그곳에 살았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붙박이 삶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다시 한국, 다시 미국 미네소타, 다시 한국, 캐나다 몬트리올, 다시 한국, 다시 캐나다 밴쿠버로... 길게는 2년 남짓, 짧게는 1년 정도를 단위로 유목민처럼 이동하며 살고 있다. 현재  밴쿠버에서 가장 긴 타국생활을 이어가고 지만, 이 안에서도 벌써 몇 번을 이사하였다.


대학을 근거로 한 이동이었기에 정착해 사는 한국인 이민자와 교류를 많이 나누지는 못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예기치 않은 기회에 정말 마음을 깊게 나눈 한두 명을 꼭 만나곤 하였다. 그렇게 타국에서 속정을 나누고, 유목민처럼 기약 없이 또 헤어졌다. 헤어질 때 서로 아무 말 못 하고 뜨겁게 포옹만을 나누었다. 비행기로 오가야 하는 거리이니, 참 속절없는 이별이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지금보다 해 내야 할 일이 많았을 때는 그런대로 적응하며 잘 지냈다. 하지만 이제는 한 곳에, 내 집에 붙박이로 뿌리내려 다시는 움직이지 않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당장 이루기 힘든 간절함이 커지다 보니 그 소망은 문득씩 우울과 상실감으로 변해 입가의 미소를 가져가 버렸다.


세상에 유명한 말과 달리 피할 수 없는 일을 즐길 재간이 없다. 다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니, 나의 주관적 입장과 생각을 벗어나 한걸음 비껴서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갈망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내가 얻은 결론은 삶은 어차피 순례자이고 여행자라는 사실이다. 이동을 하며 살건, 한 곳에 정착하여 대대로 뿌리내리고 살건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나그네’ 임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길을 나선 순례자이고 여행자로 우리 모두의 삶을 바라보니, 이 생활에 조용히 순응하며 지내야 할 때려니 하는 마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제, 그리고 오늘을 또 보낸다. 아직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나그네이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 《동국여지지》2는 경기좌도 광주진 여주목조에 실린 이원익(1547~1634)에 대한 글.

 《동춘당집》6권은 송준길(1606~1672)이 조선 현종 6년(1665)에 올린 상소의 일부

출처는 한국고전종합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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