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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nChoi Aug 25. 2021

허공에 흩어진 약속

- 아픔과 미련도 흩트리길

우리 이다음에...

설레는 말일까, 허무한 말일까.


참으로 설레는 말이며, 그렇기에 이다지도 허무한 말이다.

허공에 흩어진 허무함이 되어 버린 미완의 약속은 여전히 찾아오는 가끔의 아픔이다.


고려 후기 문신이며 학자인 민사평(1295~1359)이 있다. 그는 재상에 오른 문신인 허옹(?~1357), 이색과 더불어 돈독한 친분을 나누며 교유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사정인지 허옹이 약속에 오지 않았고, 민사평은 그 허탄한 마음을 시로 남겼다.


구슬퍼라 그리운 이는 아득히 천리 밖에 있는데

해마다 좋은 날은 누구를 위해 돌아오나


복사꽃 붉고 자두꽃은 희게 피는 한창 좋은 시절이건만

꽃 아래 노닐던 사람 약속해 놓고 오지를 않네


물어보노니 ‘단계’는 어디에 있는가

거문고 안고 슬퍼하며 헛되이 돌아오네


시를 지은 민사평의 호는 '급암'이었고, 시에 나온 '단계'는 허옹의 호였다. 민사평은 허옹과의 이루어지지 못한 약속을 ‘슬프고 원망스럽다’(怊悵)는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할 정도로 아쉬워하였다.


어릴 때 유달리 아빠를 따르던 친구의 딸이 이다음에 결혼하면 2층 집을 지어 1층에 자기 부부, 2층에 아빠 엄마가 살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사춘기에 접어든 뒤 그 말을 했더니, 그런 끔찍한 악몽이 어디 있느냐며 몸서리를 쳤단다. 정말 결혼한 지금은 태평양이 사이에 있어 ‘비대면’ 인사만 몇 년째 나누고 있다고 한다.


민사평이 읊은 시처럼 그리운 딸은 천리밖에 있는데 해마다 계절은 돌아오고, 기념할 날도 맞는다. 헤어진 연인을 잊었다 생각했어도, 문득 지나치는 장소에서 다음에 이곳에 또 오자던 폐기된 약속이 떠오른다.


가끔 여행지 홍보 광고를 보는 순간 여전히 눈에 선한 그날 커피 마시면서 나누었던 그 약속에 심장이 아린다. 신남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이다음에 여기 꼭 가보자고 한 그 약속.


공중으로 흩어져 버린 약속, 그래서 슬프고 원망스러운 마음을 홀로 달래야 하는 약속,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가. 소소한 일상의 계획, 설렘을 담은 언약에서부터 시대와 사회의 흐름 속에 생명과 운명이 엇갈려 돌이키기 힘든 비극으로 새겨진 약속에 이르기까지.


삶을 슬픔으로 채울 수는 없는 일이다. 삶의 의미를 거창하게 되새기거나, 유한한 시간을 보다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등의 의미는 차지하고, 일단 슬픔은 감당하기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간다면  나의 슬픔이 나만의 문제로 머물지 않기에 더욱 그러하다. 나를 아끼고 바라보는 주변 사람, 내가 속한 공동체에까지 그 슬픔의 기운이 퍼지기 마련이다. 허공에 흩어진 약속을 다시 주어와 일정에 끼워 넣을 수도 없다. 흩어진 연기를 어찌 다시 모아 불을 지필 수 있을까.


기억조차 못할 많은 약속이 흩어졌는지 몰라도, 오늘 여전히 내 달력은 책상 위에 사각으로 버티고 있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칸칸이 깨알 메모가 있다. 여기 지금 이렇게 내 눈앞에 있는 메모들, 내가 지켜야 할 약속들, 그 약속과 관련된 사람들... 그 소중함 위에 흩어진 약속에 대한 허망함이라는 회색 덧칠을 하지는 말자고 뇌여 본다.


팬데믹 이후 어떤 면으로  인간의 약속이 일종의 오만함이라고까지 느껴졌다. 팬데믹의 세상이 되리라 상상도 못 한 채, 세상을 인간이 주도해 나간다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약속과 계획을 세웠었던가. 호흡하는 한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약속을 하며 살아가겠지만, 현재에 진심을 다하며 지금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련다.


※ 시의 출처는 《급암시집》 2, 〈단계 허 선생 옹 시에 화운하다〉. 한국고전번역원 DB.

《급암시집》은 고려후기 문신이며 학자인 민사평(1295~1359)의 시집. 1370 간행


<허공>


나는 책을 보고

너는 나를 보았지


이제 나는

자꾸 하늘을 보는데

너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하늘 너머 허공 속에

소멸한 우리의 약속


하지만

같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

그대 잘 지내기를...


혹여 나와의 약속이

아픔으로 있다면

그것도 흐트려 던지기를..


글/그림 Seo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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