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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Feb 06. 2020

악행, 선행  

니체는 악행을 권한다. 행위의 과정에서 문제를 터뜨리고 해결해주고 다른 지평이 열리기 때문이다. 또 작은 악행의 쾌감이 큰 악행을 막아준다고 했다. 더 엄밀히 말하면 니체에게는 악행도 선행이다. 

“악행과 선행 사이에 종류의 차이란 없다. 기껏해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삶의 유용성 전략에 따라 이뤄진다.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중에서 


육아휴직을 결정할 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단 한가지, 동료들이었다. 남겨질 나의 동료 중에 감사하게도 ‘이것은 당연한 권리다. 네가 없어도 회사는 굴러간다’ 라는 말로 나를 위로해주었지만, 자꾸만 생기는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 결정은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나는 결국엔 그렇게 악하다고 생각했던 결정을 내렸다. 나름 나에게는 큰 악행의 순간이었다. 

악행의 결과, 나는 지금 또 다른 인생의 지평을 만났다. 


아이가 유치원 버스에서 나를 보며 함박 웃음 짓는 슬로모션 같은 그 순간을 매일 맞이하고 있고,  햇빛이 드리우는 집의 아늑함을 느끼고 있고, 나에 대해 성찰하고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을 글로 남기고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뒤에서 욕하고 힘들어하던 그 어리석음의 땅에서도 벗어났다. 누군가에게는 악행으로 비춰질 수 있었던 나의 결정이 최소한 나에게는,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는 선행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느끼게 해 준 악행에 후회가 없다. 최소한 그것은 나에게 나를 위한, 우리 가족을 위한 선행이었다. 

 

악행도 선행이다. 그리고 나의 상황은 내가 저지른 악행인지도 선행인지도 모르는 그 행동의 결과이다. 즉 그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한 전략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행동을 욕하기 이전에,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왜 다른지 의문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어쩌면 악행이냐 선행이냐를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기준이 될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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