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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리 Feb 20. 2022

숙제가 어려운 8살

 우리 세 식구에게 일요일 저녁의 온도는 쌀쌀하다. 직장인 부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않다. 이 쌀쌀하고 쓸쓸하기까지 한 주말의 끝자락을.

그리고 8살. 초등학생을 준비한 우리 딸 로즈도, 언제부턴가 일요일 저녁의 싸늘한 공기를 알아가고 있다.

로즈는 7살 가을 즈음 연산 학습지를 시작했다. 학습지 선생님은 화요일에 방문하신다. 처음엔 쉽기만 했던 이 더하기는 이제 제법 뒷자리에 6,7,8,9 큰 수가 나오고 있다. 거기다 숙제의 양도 점점 많아지자, 로즈는 점점 ‘수, 목, 금, 토, 월’ 순서대로 적힌 날짜를 무시하고 숙제를 미루고, 일요일 저녁 벼락치기를 한다.


처음에 학습지를 시작했던 건, 사실 더하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사실 얼떨결에, 갈팡질팡하는 맘에 했지만, 매일 규칙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버릇을 들이자’라는 꽤나 괜찮은 취지로 포장해 지금까지도 버텨오는 중이다.


근데 요 몇 주, 매일 잘해오던 숙제를 아이가 하지 않는다. 평일 저녁 해맑게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며 ‘요놈 봐라.. 스스로 할 때까지 놔둬야지.. 나중에 후회할 텐데…’ 혼자 마음속으로 벼르고 있다. 그렇게 평일 동안 쌓아둔 내 잔소리는 일요일 저녁, 차가운 공기를 더 차갑게 만든다.

“ 너… 학습지 다 했니??”

그때부터 아이는 세상 모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숙제를 시작한다.


로즈는 수요일부터 차곡히 쌓인 숙제를 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책상에 엎드린 건지 누운 건지, 연필은 드러누운 지 오래고, 지우개는 널브러져 있다. 누가 봐도 하기 싫다는 표정 한가득이다.


엄마도 이때부터는 약간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조용히 연필을 쥔 손을 잡아 멈춰 세운다. 화가 나지만, 입술에 힘을 바싹 주며 말한다.

“이렇게 할 거면 하지 마.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얼굴은 억지로 웃고 있고, 최대한 상냥하게 말하지만, 이 냉기는 그대로 로즈에게 전달된다.


“할 거예요…”

“아니… 이럴 거면 하지 마… 엄마가 2주 전부터 지켜봤는데, 매일 숙제 계속 미루고, 누가 봐도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고 있잖아. 그럼 안 하는 게 맞을 거 같아. 네가 다시 잘할 수 있을 때, 그때 말해줘.”

로즈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너를 보며, 엄마는 또… 가슴이 덜컥 무너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이미지출처 : https://pin.it/71NvqHu



엄마의 엄마, 지금 로즈에게 한없이 다정한 외할머니는 사실 엄마에게는 무서운 존재였다. 지금의 로즈와 똑같은 학습지를 나도 8살 즈음 시작했다. 지금처럼 아빠, 엄마는 바빴고, 오빠와 나는 정해진 학습지를 매일 풀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엄마 역시, 매일 놀다 보면, 미루기 일쑤였고, 숙제가 쌓여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엔 세상에 너무나도 재밌는 게 많은 나이였다.


더운 여름날이었을까. 숙제를 다 하지 않고 학습지 선생님을 맞이했다. 다행히 자주 선생님이 오실 때 엄마가 집에 없어, 그날도 숙제를 하지 않아도 잘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학습지가 끝날 무렵 허겁지겁 들어오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현관문 앞에서 가방도 내려놓지 못한 채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는 모습.

선생님이 가고, 엄마는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학습지를 꺼내보라는 엄마의 말에 조용히 책상 위로 학습지를 올려두었다. 엄마는 말없이 학습지를 보시고는 그대로 휴지통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폭풍 같은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날 밤, 나는 나름 내 잘못을 반성하며 휴지통에 처박힌 학습지를 구출해, 울면서 밀린 더하기를 써 내려갔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 몇 년간 학습지를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숙제라는 건 나와의 싸움이고, 내가 해내야 한다고 했고,  책임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더하기 들을 잘할  있을지 궁금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숫자들의 합보다, 어떻게 하면 8  삶에  더할  있을지가 궁금했는지 모른다.


그때 엄마는 정답을 찾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책을 읽어가며, 유명한 누군가의 조언을 들어가며, 너를 키우며,  그 정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너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니, 나는 아직 8살 나에게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거기서부터 잘못됐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닦는 아이가 말한다.

“엄마, 더하기가 싫은 게 아닌데, 자꾸 레고놀이하다 보면, 엄마 아빠랑 책 읽다 보면, 오늘 해야 한다는 걸 까먹어요. 엄마가 말해주면 그때 알게 돼요”

근데 숙제는 네가 해야  일이고, 엄마가 매번 확인해줄  없어. 스스로 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엄마가 너한테 따끔하게 말한 거야…”

근데 그게 아직 어려워요..”

곧 흐를 것 같은 눈물이 흐르지 않게 로즈를 품에 안아 나의 옷에 눈물을 닦는다.

“엄마가 또 미안하네… 그게 어려운 건지 엄마가 잊고 있었네… 맞아 그거 어려운 거 맞아.”


우선 샤워부터 하기로 하고, 로즈의 샤워를 도와준다. 머리를 감다가 말한다.

엄마, 예전처럼 매일 시간표를 짜서 구몬 하는 시간을 잡으면 어때요? 요일마다 시간표에 있으면 까먹지 않을 거 같아요. 동그라미 7개 그려서..!”

오 좋은 생각이다! 우리 예전에 코로나 때문에 유치원 못 갈 때는 그렇게 했었는데 요즘 생활계획표 안 그린 지 오래됐구나! 진짜 좋은 생각인데?”

머리 감는데 갑자기 이 생각이 났어요! 우리 당장 생활 계획표 만들어요!”


눈물이 핑 돈다. 너는 정답을 찾았구나. 그리고 너와 똑같았던 8살의 엄마에게도 정답을 알려줬구나…


오늘도 고맙고 또 고마운 나의 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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