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리 Aug 28. 2022

냉장고 청소

 하루에도 수십 번은 열고 닫는 냉장고. 문을 여닫을 때마다 비릿하고 냄새가 난다.

위태로운 탑을 쌓고 있는 반찬통, 비닐로 칭칭 감긴 채소, 과일. 뭐 그 밖에 차가운 기운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언제부턴가 이곳에 정처 없이 모아졌다.

차곡차곡 쑤셔 박힌 이곳에서 나는 이 역한 냄새를 매일 맡으며 기약 없는 다짐을 했다.

‘언젠가는 꼭 정리한다..’


유난히 하늘이 파랬던 토요일 오후,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던 선선한 바람이 뜨거운 햇살과 함께 불어왔다. 문득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딸아이에게 미션을 내렸다. 지금부터 최소 2시간 최대 3시간 동안 주방에는 들어오지 말 것. 물도 마실 수 없냐는 질문에 최소한의 자비도 없음을 단호하게 말했다. 고로 가급적 나가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 오랜만에 김동률 노래 모음을 검색해 크게 틀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를 배경 삼아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

오늘이다.


우선 안에 있는 모든 음식물들을 다 끄집어냈다. 저 깊숙한 곳에, 또 가장 가까운 곳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띠링띠링, 냉장고 문이 계속 열려있다는 알람 소리가 동률 오빠의 저음과 섞여 또 다른 브금을 만든다.


서랍과 칸막이를 모두 불리해 반찬 국물인지, 뭔지 모를 얼룩을 모두 씻어냈다. 그다음 냉장고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21.03.09 유통기한을 훌쩍 넘긴 발사믹 소스. 작년 여름에 엄마가 보내줬던 미숫가루. 언제였는지도 모르는 각종 즙류. 폭삭 삭힌 쉰 김치. 지난주에 사둔 쪼글쪼글 오이. 조금씩 남은 각종 잼과 치즈. 딸아이가 모아둔 먹다만 음료수들.

이 모든 것들이 제멋대로 대책 없이 쌓이고 있었다. 언제 이걸 넣었는지 기억도 없고, 잡히는 대로 그냥 냉장고에 넣었으니 냄새는 물론이고, 늘 정리가 안 되는 개 당연했다.

하나하나 버릴 것들을 싱크대로 옮기고, 다시 냉장고로 들어갈 것들을 분리해둔다.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냉장고 문은 열려있었다. 비릿한 냄새를 모두 지우고, 날아갈 수 있게 열어두었다.



청소를 모두 끝냈다. 동률 오빠의 노래는 같은 곡으로 두 바퀴를 돌았다.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아직 냉기가 다 차지 않았다. 익숙했던 비릿한 냄새는 아직 미세하게 남아있기는 했지만 역할 정도는 아니었다.

차례로 줄 서진 맥주 캔들과 찾기 쉽게 놓인 소스들을 보니 기분이 좋다.



  문을 열 때마다 짜증 나고, 막연하고, 어려운 건 냉장고만이 아니다.

 언제 넣어둔지도 모르고, 진즉에 버렸어야 할 수십 가지 감정들이 뒤섞인 내 마음도 똑같이 닮아있다.

 쾌쾌한 냄새가 나는 감정들은 이제 다 쓰레기통으로 보내야 하고, 뒤죽박죽 섞인 감정들은 찾기 쉽게 정렬이 필요하다.


 일요일 아침.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다시 찾은 냉기와 함께 냄새를 없애려고 함께 넣어둔 커피찌꺼기와 계피가루의 향이 났다.


이제 여름의 마지막을 전하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나는 막연했던 나의 두 번째 문을 활짝 열었다.

이미지 출처 : 핀터레스트



작가의 이전글 방황의 기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