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 사랑으로 시작된 영원한 이야기

고전소설 『구운몽』을 읽고

by 율리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처음 만난『구운몽』은 단순했다. 양소유라는 남자가 여덟 선녀와 사랑에 빠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결국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었다는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 그때의 나에게 구운몽은 '인생무상'이라는 다소 허무하고, 있어보이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고전소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이 작품을 다시 읽게되니 전혀 다른 것이 보인다.



김만중이 『구운몽』을 쓴 동기를 알면, 이 작품이 왜 3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사랑받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유배지에서 홀로 남겨진 칠순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녀를 위로하고자 펜을 들었던 아들의 마음. '구운몽'이라는 제목 자체가 "가슴 속에 구름과 노을을 품었다"는 뜻으로, 비록 유배를 왔지만,마음은 평온하니 아들 걱정하지 마시라는 메시지였다. 이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감정, 바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 아닐까.

어머니를 향한 '사랑'으로 시작된 이 소설은, 그 창작 의도 자체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성을 품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만큼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정이 또 있을까. 스페인어판과 영어판 『구운몽』의 서문에서도 여전히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듯 하다. 문화와 언어가 달라도,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감정일테니 말이다. 학창시절의 나는 구운몽에서 허무주의만을 읽었지만, 이제는 그 이면의 깊은 사랑을 본다.


이 소설 속에는 불교의 공(空) 사상이 말하는 "있으되 비어있고, 비어있으되 충만한"의 메시지가 있다. 이는 단순한 허무함이 아니다. 오히려 세속적 욕망을 비워냄으로써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라는 세계관이다. 양소유가 꿈에서 깨어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는 순간, 그는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근원적인 사랑, 즉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김만중은 유교, 불교, 도교의 어려운 철학을 일반 민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로맨스'라는 친숙한 소재로 풀어냈다. 양소유와 여덟 선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흥미진진한 서사 속에 깊은 진리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것이다. 이는 단순한 문학적 기교가 아니라, 어려운 진리를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게 만들고자 했던 민중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구운몽』은 임금부터 일반 민초까지 모든 계층의 독자를 확보할 수 있었고,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영조, 정조 모두 이 소설을 극찬했다고 한다!)


또한 흥미로운 부분은, 일본 최초의 여성 작가이자, 화폐에도 등장할 만큼 존경 받는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는『구운몽』을 정성스레 필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당시 구운몽을 통해 일본 봉건사회와는 전혀 다른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는 김만중이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이 작품을 썼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여성을 단순한 욕망의 대상이 아닌, 존경받아야 할 존재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홍루몽』과 견줄 만한 명작으로 인정받았고,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은 『구운몽』에서 동양의 문화와 철학을 발견하며 서구에 한국 문학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현재까지 8개 국어로 번역되어 『춘향전』 다음으로 해외에서 많이 출간된 한국 고전이 된 것도, 결국 그 바탕에 흐르는 보편적 사랑의 힘 때문은 아니었을까?


350여 년 전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한 편의 소설이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는 한 소녀가 몇 십년이 흘러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가지게 해주고 있다. 이는 구운몽이 단순한 연애소설이나 권선징악의 교훈서가 아니라, 인류 가장 순수한 감정인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사랑은 어머니를 향한 효심에서 시작되어,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으로 확장되며, 마침내 독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사랑을 깨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25년. 다시 꺼내든 구운몽을 읽는 내내, 자꾸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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