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문장 수집가의 다짐: 나뭇잎 한 장에서 숲으로

스즈키 유이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을 읽고

by 율리

2025년의 마지막 날, 나는 한 권의 책을 덮으며 2026년을 맞이했다. 바로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조금 낯설었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조금 생소한 이야기 방식, 묘하게 비틀린 듯한 방식에 처음엔 집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읽을수록 '아, 이런 게 신선하다는 거구나'를 깨달았다. 동시에 '이런게 바로 AI가 따라 할 수 없는 글이다'를 생각했다.


소설은 평생을 괴테 연구로 보낸 독문학자인 주인공이 우연히 티백에서 발견한 괴테의 명언의 출처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이 설정이 펼쳐지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단순한 추적의 이야기가 아니다. 방대한 지식을,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 엮어내고, 풀어낸 작품이다. 결코 얕은 지식으로는 쓸 수 없는, 인간 사유의 깊이와 지적 능력, 맥락의 촘촘함, 그리고 놀랍게도 뭔지 모를 귀여움까지. 모든 것을 갖춘 소설작품이였다.


AI가 글을 대신 써주는 시대다. 버튼 하나 누르면 그럴듯한 문장들이 쏟아진다. 빠르고, 효율적이고, 때로는 꽤 그럴듯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빛을 발하는 것이 이거구나를 책을 읽일 수록 느꼈다. 인간만이 가진, 수십 년을 한 분야에 천착하며 쌓아 올린 지적 세계를 사랑으로 엮어내는 능력.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삶을 녹여내는 힘. 절대 AI는 따라올 수 없는, 시간과 경험이 배어든 그런 글이다.


나는 명언을 사랑한다. 명언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 소설을 읽으며 ‘텍스트’로서의 명언에 대해 깊이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명언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개 길고 복잡한 상황, 어떤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이 특정한 상황과 고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뱉어냈을 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그 전체의 맥락은 알지 못한 채, 한 줄의 문장만을 붙잡고 기억하고, 간직한다.


그럼에도 나는 명언을 하나의 ‘맥락’이라 부르고 싶다. 이는 명언이 탄생한 과거의 맥락이 부재함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 한 문장이 내 삶의 새로운 맥락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아름다운 영감을 주는 문장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삶과 혼연일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다. 타인의 삶에서 튀어나온 파편이 내 삶의 뿌리가 될 때, 비로소 그 명언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는 의미다.


"결국 작가나 사상가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나뭇잎 한 장으로 자신의 숲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잖아."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래.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인생을 써 내려가는 작가들이다. 문장을 수집하고 명언을 탐독해온 내게 이 말은 강렬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책을 읽고, 문장을 모으고, 기록하는 것을 사랑한다.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메모하고 밑줄 치며 기억하려 애썼다. 때로는 그저 수집가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자문하기도 했지만, 텍스트를 향한 나의 애정은 진심이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한다. 나뭇잎을 모으는 것과 숲을 만드는 일은 다르다는 것을. 모으는 행위는 숲을 향한 첫걸음일 뿐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책 속에 등장한 이 문장은 2026년 나의 첫 나뭇잎이 되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뒤섞이는 게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혼동과 혼연일체는 엄연히 다르다. 혼동은 경계가 흐려지며 뒤엉키는 것이지만, 혼연일체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내가 매일 읽고 쓰는 이 텍스트들과 혼연일체가 되는 것. 그것이 내가 만들고 싶은 숲의 모습이다.


2026년이 밝았다. 올해 내 숲의 나무가 얼마나 자라날지는 알 수 없다. 거창한 계획이나 세상을 바꿀 대단한 목표를 세운 것도 아니다. 다만 한 해의 시작과 끝을 이 책과 함께하며 세운 다짐은 선명하다.


좋은 문장을 수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자. 글귀에 감탄하는 것을 넘어, 그 텍스트를 내 삶의 맥락으로 가져와 혼연일체 시켜보자. 나뭇잎 한 장 한 장을 정성껏 모아, 천천히, 그러나 진심을 다해 나만의 숲을 만들어가자.


그 숲은 아마도 느리게 자랄 것같다. 어떤 날은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보태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누군가의 명언을 믿는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하나가 되어가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숲을 일구는 행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세계를 여행하는 일이지만, 살아낸다는 것은 나만의 숲을 가꾸는 일이다. 2026년, 우리 각자의 숲이 저마다의 색으로 깊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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