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테이블이 많은 집

by 율리

30평이 조금 안 되는 방 3개짜리 우리 집. 이 곳에는 총 5개의 테이블이 있다. (여기서 테이블은 책상, 식탁 등을 통틀어 말한다.) 4년 전 이 집에 이사 왔을 때는 식탁 하나, 화장대로 쓰던 테이블 하나가 전부였다.


아직 아이는 어렸고, 맞벌이 부부인 우리가 집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은 많지 않았기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다 지난 2년, 우리는 강제적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갑자기 찾아온 세상의 변화는 그저 눕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집의 변화를 요구했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각자의 삶을 존중해야 했다.


따로 또 같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각자’의 삶이 ‘집’이라는 공간에서 녹여들 나름의 전략이 필요했다.


제일 먼저 나는 공간을 바꿨다. 단순히 침실, 옷방, 아이방, 거실&주방으로 나누어졌던 이 곳에 경계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고, 또 함께하기 위한 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상징적인 도구로 나는 '테이블'을 택했다.



첫 번째 테이블, 부부 침실 -> 남편의 공간

부부가 함께 쓰는 침실에는 크게는 침대와 TV가 있다. 그리고 화장대로 쓰는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사실 화장에 재주가 없어 화장하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기에 이곳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더욱이 외출하는 시간이 줄어드니 화장의 횟수도 줄어 그 활용도는 더 낮아졌다. 이 아기자기한 원목 책상에 새로운 주인이 필요했다.


남편은 영어공부에 진심인 사람. 매일 아침 EBS로 영어 공부를 한다. 늘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월별 교재를 들고 졸린 눈을 비비며 식탁에서 공부를 했다. 점점 쌓여가는 교재와 형광펜, 연필 등을 위한 제 자리가 필요했다.


화장대에 있는 화장품과 잡동사니를 위해 이케아에서 작은 긴 서랍장을 구매했다. 드라이기를 비롯한 잡다한 것들을 모두 정리하고 제일 위에 화장품을 진열해, 테이블을 비웠다.

이제 이 테이블은 매일 아침 남편을 위한 공간이 되었고, 작은 조명과 몇 가지 책을 진열해 꽤나 분위기 좋은 공간을 만들었다.


요즘 엄마들이라면 친숙한 Piggy&Gerald. 두 귀요미가 시선강탈이다 :)


두 번째 테이블, 드레스룸 -> 나의 공간

부부 침실과 마주 보는 곳에는 옷방이 있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시스템 옷장을 과감하게 짜서 들어왔던 터라 이곳은 어쩔 수 없이 그저 '드레스룸'으로의 기능 밖에 할 수 없었다.

재택이 길어지면서, 듀얼 모니터의 설치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큰 모니터와 키보드, 노트북을 올릴 수 있는 책상의 존재도 함께 여야 했다. 나름 야근이 있을지도 모르고, 잦은 Zoom 미팅을 위해서 독립된 공간을 고려할 때, 재택 환경이 조성 될 수 있는 곳은 이 곳 옷방 밖에 없었다.

그렇게 과감히 입지 않은 옷들을 반 이상 정리했고, 그렇게 시스템 옷장의 반을 해체해 당근에게 맡겼다. 그렇게 책상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건조기 옆에, 긴 원목 테이블을 들였다. 모니터와 노트북, 키보드, 달력, 스탠드로 책상을 꾸몄다. 1년 넘게 이어지는 내 재택생활은 슬기롭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매일 이 곳에서 글을 쓰며 나만의 공간을 완성했다. 이제 더는 이 곳을 드레스룸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기엔 이 테이블의 존재가 엄청 크기 때문이다.

나름 아늑한 이곳, 매일 눈을 뜨면 이 곳에서 글을 쓰며 하루를 시작한다.



세 번째 테이블, 아이방

이곳에는 아직 좌식 테이블이 없다. 이 방의 주인은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되는데, 그때 책상을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대신 바닥에 앉아 놀 수 있는 작은 접이식 테이블이 있는데, 아이는 이 곳에서 레고를 만들고, 레고캐릭터들로 인형놀이를 한다.


늘 눈 뜨자마자, 엉금엉금 기어가 제일 먼저 레고들을 깨우고, 자기 전에는 침대에 눕혀준다. 수 많은 레고와 작은 캐릭터들이 모여 있는 이 테이블은, 아이에게는 때로는 궁전이 되고, 마법의 숲이 되는 그 어떤 곳보다도 더 큰 곳이다.



마지막 테이블, 가족 모두의 주방&거실

우리는 주방&거실을 모두의 공간이라 부른다. 이 두 곳은 기능적으로 분리가 되어 있지만 사실 1개의 공간이라 해도 무방한 하나의 공간이다.

이 곳에는 모두가 함께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2개가 있다. 밥을 먹는 하얀 원탁의 식탁과 모두 함께 앉아 책을 읽고 이야기를 위한 타원형의 가족 테이블.


우선 하얀색 식탁에 앉아 매일 1번 이상 함께 밥을 먹는다. 예전 같으면 평일엔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이제는 하루 1번 이상은 무조건이다. 밥을 먹는 이외에는 식탁을 깨끗이 하고 휴지나 꽃을 올려두며 나름 소소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무조건 간식은 이 곳에서 먹는 것으로 규칙을 정했다.


그리고 올해 초, 나는 과감히 거실에서 소파를 없애고, 책장과 지금의 타원형 원목 테이블을 마련했다. 이 테이블에서 우리는 자기 전 30분 이상 함께 책을 읽고 일기도 쓰며 시간을 보낸다. 아직은 이 곳에서 보드게임을 하는 시간이 월등이 많지만, 아이가 더 커갈수록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가족. 가족이라는 존재. 가족이기 이 전에, 우리는 개인이었고, 개인이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배려해야 하는 어려운 관계.

우리 집 5개의 테이블. 이 도구들은 우리 가족이 서로의 건강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이들이 받쳐주는 든든한 판위에서 우리는 각자의 삶을, 그리고 함께의 삶을 따로 또 같이 펼치고 있는지 모른다.


앞으로 어디로 이사가던지 간에, 각자의 테이블 그리고 모두를 위한 테이블을 마련하리라 나름의 인테리어 철학을 세워본다.



<매일매일 도구도구>
세상의 모든 만물에는 각자의 서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선택해, 나를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도구들이 가진 본연의 역할, 맥락을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그 안에서 이뤄지는 저만의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해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기다림의 미학, 스테인리스 프라이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