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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fish, 잊힌 이름의 바다

케치칸에서 들은 마지막 항해, 마지막 이야기

by 헬로 보이저

10층 라운지. Sunrise

이야기를 들려주신 어르신


알래스카 바다


바다는 아직 새벽빛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거대한 숨결을 감추고 있었다.


깊은 검은 물결이 배 아래에서 출렁였고,

창문마다 어둠이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나는 비몽사몽 눈을 비비며 복도를 따라 걸었다.

10층 라운지로 향하는 길은 길고 조용했다.

붉은 카펫은 내 발자국 소리를 삼켜버렸고,

벽마다 달린 은빛 조명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사람들의 기척은 거의 없었다.

배 전체가 마치 꿈속처럼 고요했다.


---


라운지 문을 밀자,

거대한 유리창이 나를 맞이했다.

창 너머엔 끝없는 바다.


별빛조차 희미한 새벽 다섯 시,

검푸른 수평선이 천천히 숨 쉬고 있었다.


나는 창가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대었다.

커피 향이 멀리서 희미하게 흘러왔고,

공기는 차갑고 맑았다.


어둠 속에서 나는 오직 하나,

다가올 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 순간—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할아버지가

고개를 창밖으로 돌린 채 조용히 말했다.

“굿모닝, 일찍 일어났네.”

“새벽이 보고 싶어서요.”


그는 잠시 미소 짓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여섯 살 때… 처음으로 노를 저었지.

그 조각배 안엔 지렁이들이 가득했어.”


그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유난히 또렷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치 오래된 필름이 돌아가는 듯

그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랑 바다에 나가 낚시하곤 했지.

내 첫 조각배는 어떤 사람들이 줬는데,

안에는 지렁이랑 벌레들이 가득했어.

그 배에 앉아서…

나는 조그만 팔로 이렇게 노를 저었어.”


그는 두 손을 공중에 들어

아이처럼 천천히 노 젓는 흉내를 냈다.


그 작은 동작 안에서

바다의 시간들이 조용히 밀려왔다.


---


“그때 그 바다엔 늘 뭔가가 있었어.

연어를 쫓는 청어,

청어를 쫓는 물개,

물개를 쫓는 고래…

배 주위에 생명이 겹겹이 돌고 있었지.”


그리고, 그 고래.


우리는 지금 ‘오르카(Orca)’라고 부르지만,

그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우린 그 고래들을 **blackfish**라고 불렀어.

난 열여덟,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blackfish가 orca,

그러니까 범고래라는 걸 몰랐지.”


오르카.

지금은 다들 그렇게 부르지만,

그가 자라던 바다엔

그 이름보다 오래된 단어가 있었다.


**Blackfish.**


검은 물결 속에서 느리게 움직이던 생명.

그의 어린 시절이 기억하는 야생의 이름이었다.


---


“지금도 위쪽 인디언 마을에 가면

그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불러.

blackfish라고.”

그리고 그는 창밖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이 항로는… 아마 내 인생 마지막일지도 몰라.

그래서 이 이야기를 지금 꺼낸 거야.”


그는 웃었지만,

그 웃음엔 파도가 말없이 밀려 나가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에겐 잊힌 단어.

누군가에겐 아직 살아 있는 생명.


바다는 이름을 바꿨지만,

그의 기억은 여전히 blackfish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제,

마지막 항해 위에서

다시 한 번 바다로 떠올랐다.


---


아침 9시, 우리는 캐치칸 항구에 내렸다.

도시는 축제로 시끌벅적했지만,

우리는 곧장 **토템 마을**로 향했다.


이 땅은 **팅기트(Tlingit)**, **하이다(Haida)**,

그리고 **침시안(Tsimshian)** 사람들이 지켜온 자리였다.

그들의 손은 나무 위에 얼굴을 새겼고,

그 얼굴은 지금까지도 바람 속에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알래스카를 이해하려면,

먼저 나무에 새겨진 얼굴들을 만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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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무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햇빛 아래 드러난 얼굴들은 웃고, 울고,

어떤 것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토템 장인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토템은 장식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 가족의 역사이자, 마을의 기억이에요.


우린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 나무에 이야기를 남겼죠.”


그는 나무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설명했다.


> 까마귀는 세상을 만든 창조의 영혼,

> 오르카는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

> 곰은 보호와 용기,

> 독수리는 균형과 존엄.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는 낮게 말했다.


“많은 토템이 사라졌습니다.

땅을 빼앗기고, 언어를 금지당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이 나무들이 남아,

우리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 말이 가슴에 남았다.

바람이 불자, 조각된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순간, 나는 오래된 목소리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것을 들었다.


이건 죽은 유물이 아니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영혼의 기록**이었다.





케치칸 마을

토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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