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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ar Light 1 : 알래스카로 가는 밤

바닷바람의 전설

by 헬로 보이저


밴쿠버 항구, 캐나다 크루즈 내부.환영 행사

크루즈 메인 다이닝 라운지 라이온스 게이트 브리지

조지아 해협 (Georgia Strait)


크루즈에 오르기 전날,

우리는 밴쿠버 항구에 붙어 있는 **Pan Am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바다 냄새가 은은히 스며드는 방에서

조금 느슨하게 저녁을 준비했다.


근처 한국 마켓에서 사 온 참치김밥과 우엉김밥,

닭강정 한 팩.

그게 배에 오르기 전, 우리의 마지막 한국 음식이었다.

한남 체인에서 사 온 김밥은 놀랍도록 맛있었다.


그날 오후, 해가 지기 전 항구를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따뜻했고, 물빛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깊고 조용했다.

‘참, 아름다운 나라야.’

그 말이 내 입속에서 천천히 맴돌았다.


언젠가 캐나다에 대해 다시 쓰게 된다면,

그날의 밴쿠버부터 꺼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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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햇살보다 먼저 눈을 떴다.

창문을 여니 **실버시 노바(Silversea Nova)**가 정박해 있었다.

바로 우리가 타게 될 배였다.


생각보다 작았다.

그 자그마한 선체 안에

우리가 지나갈 바다와 대륙이 들어 있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몇몇 고객들은 “배가 너무 작다”고 말했다.

대형 크루즈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이 배의 진짜 매력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실버시는 겉보다 속을 기억하게 만드는 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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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versea**는

이탈리아의 *레페브르* 가문과 모나코의 *블라소프* 그룹이 만든

세계적인 부티크 크루즈 브랜드다.

지금은 **로열 캐리비안 그룹**의 럭셔리 라인으로,

전 세계 상위 1%가 사랑하는 배.

매 선박마다 정원이 작고,

1:1 크루 서비스에, 모든 객실이 오션뷰 스위트룸.

미쉐린급 다이닝, 와인 페어링, 스파와 도서관까지

모두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올 인클루시브’ 시스템.


작지만, 가장 섬세한 배.

실버시는 그렇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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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승 절차는 놀라울 만큼 간편했다.

호텔 바로 아래가 크루즈 터미널이라

엘리베이터만 타고 내려가면 그곳이 곧 출국장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캐비어를 올린 크래커와

한 입 크기의 핑거푸드들이 우리를 맞았다.

은색 트레이에 샴페인이 조용히 따라졌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고,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아, 이 배는 겉은 조용하고 작지만

배 안은 로열 그 자체구나.”

그게 첫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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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웰컴 디너 파티가 있었지만

우리는 일찍 잠들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다음 날 새벽을 온전히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새벽,

바다는 낮게 숨 쉬었고

하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군가는 기대를,

누군가는 버킷리스트의 꿈을 안고 이 배에 올랐지만—

우리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기록하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빙하가 녹는 소리를 들으러,

고래의 눈동자와 마주하러,

그리고 무엇보다,

지구의 시간 앞에 서기 위해.


목적지는, **알래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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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항구가 멀어질 때,

도시의 불빛은 금빛 실처럼 바다에 흩어졌다.

갑판 위에서 우리는 낯선 긴장과 설렘 속에 서 있었다.


잔 속의 샴페인 기포가 반짝였고,

어둑한 산맥이 수평선에 녹아들었다.

그 순간, 바닷바람이

오래된 이야기꾼처럼

옛 전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누피아트 노인들은 말했다.

> “빙하는 살아 있다.

> 무너지는 소리는 슬픔이 아니라,

> 우리에게 남긴 노래다.”


밤바다를 달리며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바위보다 단단한 얼음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고래와 바다사자는 계절마다 돌아왔다.

사람들은 그 리듬을 따라 살았다.


**알래스카의 첫 역사는,

자연과 인간이 나눈 호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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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차가운 바다를 가르며 러시아 상인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눈은 해달 모피에 번쩍였고,

수천 마리 해달이 사냥당해 사라졌다.

바다는 한동안 침묵했고,

원주민의 삶은 균열을 맞았다.

러시아 정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고,

언어와 문화가 뒤섞이며

이 땅에는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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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러시아는 이 땅을 720만 달러에 미국에 팔았다.

“얼음 덩어리”라며 비웃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곧 황금과 석유, 전쟁의 열쇠가 이곳에서 터져 나왔다.


알래스카는 변방이 아니라,

제국의 판도를 흔드는 무대가 되었다.

러시아의 그림자와

미국의 깃발이 교차하는 순간,

이 땅은 또 한 번 새로운 얼굴을 강요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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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위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밴쿠버의 불빛은 점점 작아지고,

북극을 향한 검은 바다만 남았다.


우리는 얼음을 구경하러 떠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날 갑판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알래스카의 전설과 역사를 꿰어

우리 손에 쥐여주었다.


빙하를 향해 나아가는 길 위에서,

우리는 이미

**알래스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 들어가 있었다.**




알래스카 지도. 아메리카 원주민 기마 전사

흰머리독수리. 알래스카 상징 토템폴

고서와 고지도, 알래스카 전설과 역사의 은유적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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