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질랜드 남섬의 흐린 오후
크라이스트처치 시티 트램 시티 트램 기관사
에이번 강변 산책로 (Avon River Walk) 에이번 강 다리 브리지 오브 리멤브런스 근처
호주 멜버른에서 새로운 크루즈에 올랐다.
도시는 여름빛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 마음엔 어쩐지 바람이 먼저 불고 있었다.
뉴질랜드 남섬의 피오르드랜드에서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섬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바다 위를 떠돌며, 이 땅의 계절과 호흡을 조금씩 배워갔다.
3일간의 항해.
하늘과 바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수평선 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잊고 있던 감정들과 마주했고,
세상 끝 어딘가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조용히 기대고 있었다.
그러다, 바람이 달라졌다.
바다가 초록을 품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 나라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피오르드에서 출발한 항해는
더니든을 지나 오타고 해안을 끼고 북상했고,
어느덧 크라이스트처치에 닿았다.
크라이스트처치에 발을 디딘 건 흐린 오후였다.
크루즈 터미널에서 작은 백팩을 메고 트램에 올라탔을 때,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며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첨탑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도시의 중심에서 사라진 것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바라보며 기도해 온 마음의 지점이었다.
2011년, 대지진.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대성당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그 상처는 도시 전체에 금처럼 퍼져 있었다.
성당 앞 광장엔 철제 가림막이 서 있었고,
그 너머로는 구조물과 복구의 흔적들이 보였다.
기도의 공간은 이제 무너진 채 멈춰 있었고,
그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짧은 시선만 남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 앞에 멈춰 섰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마음속에는 오래된 찬송처럼 잔잔한 감정이 번졌다.
이 도시는, 잃어버린 것을 감추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상처를 품고,
그 위에 천천히 삶을 다시 얹고 있었다.
그날 오후,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있던 자리도 찾았다.
그곳에도 더 이상 종탑은 없었다.
건물의 윤곽 대신, 공사 펜스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표정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공간은 여전히 말하고 있었다.
바람이 스쳐갈 때,
그 자리엔 보이지 않는 기도가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광장을 떠나지 못했다.
마음이, 자꾸 뒤를 돌아봤다.
대성당은 비록 아직 완전히 복원되지 않았지만,
도시는 그 위에 삶을 다시 얹고 있었다.
광장 옆엔 벽화와 작은 음악 소극장이 있었고,
거리 곳곳에선 예술과 일상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 동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모른다.
사진을 찍고, 벤치에 앉았다가,
다시 걷고, 또 걷고…
결국 숙소에 돌아왔을 땐,
내 발바닥까지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건 성당만이 아니었다.
그날은, 나도 조금 무너졌고,
그만큼 더 깊이 기억하게 됐다.
뉴질랜드는 잔잔한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진짜 아름다움을 들려주는 나라였다.
이 나라는 그저 풍경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깊은 산과 초록의 골짜기,
기후 변화에도 꿋꿋이 살아가는 고유종 식물들,
그리고 상처 난 도시조차 감싸 안는 사람들의 미소.
오래전 마오리족이 '아오테아로아(Aotearoa)'라 불렀던 이 땅은,
‘길고 흰 구름의 나라’라는 이름처럼,
바람과 구름, 빛의 층들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무너졌던 나를
조금은 회복한 것 같았다.
오타고 반도 숲 속 쉼터. 오타고 해협 노을 풍경
오타고 해협 노을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