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떠나려는 크루즈 배를 세웠다

베네치아, 기다려. 다시 올게.

by 헬로 보이저


새벽이었다.
스위스 취리히 공항,
조용한 터미널에 앉아
베네치아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이트 의자에 몸을 묻고
8시간 동안의 여유가 있다고 믿은 나는
핸드폰을 꺼내 베네치아 관광리스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산마르코 광장, 리알토 다리,
곤돌라 타는 곳, 예쁜 카페…
혼자서 작게 설레는 마음을 정리하고 있을 때,

무심코 눌러본 그 메일.
거기엔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베네치아 항구 전력 문제로 인해
크루즈는 5시간 일찍 출항합니다.”

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머릿속이 하얘진 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베네치아로 가는 비행기마저
예정보다 3시간 늦어졌다는 말.

‘아, 오늘…
진짜로 배를 놓치겠구나.’

옆자리엔
처음 본 이탈리아 신사가 앉아 있었다.

별말 없이 각자 창밖을 보던 사이,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듯 푸념을 꺼냈다.

“오늘 크루즈를 탈 예정인데요...
배가 저 없이 떠날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내 말을 천천히 들은 뒤,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전화번호를 주세요. 제가 대신해볼게요.”


그리고
크루즈 본사에 전화를 걸어
조용하고 또렷하게 말했다.

“Please hold the ship.
Miss Julie is on her way.”

나는 그 말 한마디에
그 자리에서 눈물이 날 뻔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대신해주는 다정한 개입은
가끔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다.

마르코 폴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는 이미 늦었고,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빨리 가주셔요.

운전기사는 묻지 않았고,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배가 떠나지 않기를 빌었다.

도착한 크루즈 센터,
"Miss Julie? 이제는 뛰지 않아도 돼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배 위에서 사람들이 열심히 뛰어서 오는 나를 향해 박수를 쳐줬다.

그날,
나는 베네치아를 구경하지 못했다.

곤돌라 한 번 타지 못했고,
커피 한 잔 마시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도시는 내 마음속에
가장 깊게 남아 있다.

나는 배를 쫓아 달리고 있었지만
어쩌면 내 감정은 이미
베네치아 골목 어딘가를 먼저 걷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배웠다.
어떤 일이 생겨도,
정신만 차리면
배도 기다려준다.

그리고,
누군가가 마음을 기울이면
길이 열린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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