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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Feb 14. 2021

둘이라서 좋은 점, 둘이라서 힘든 점


아이가 하나였을 때 많이 들었던 질문,

“둘째 계획 있으세요?”


“(아직은) 계획 없는데요.” 또는  “고민 중이에요.”

대답이 어느 쪽이든 간에, 그다음 따라올 말은 백에 구십은 정해져 있다.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그래도 둘은 있어야 해.”

“둘이 있으면 같이 잘 노는데 외동이면 나중에도 부모가 계속 놀아줘야 해.”

“그냥.. 둘이 아닌 하나는 상상할 수가 없어.”




  결혼 전부터 막연히 아이 둘이 있는 가정을 꿈꿨었지만, 첫째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둘째에 대한 결심을 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째 아이 때 무통 주사가 듣지 않아 진통을 그대로 느끼며 15시간 만에 출산했고, 손가락에 너무 힘을 준 데다 겨울이라 산후조리가 잘 안됐었는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마디가 딱 걸리면서 잘 펴지지 않는 증상이 생겼었다. 일명 ‘방아쇠 증후군’. 아이를 안고 있으면 다른 곳보다 손가락이 먼저 아파왔고, 핸드폰을 조금만 오래 쥐고 있어도 마디가 저려왔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은 새 발톱처럼 구부러져서 천천히 손을 주무르며 펼쳐야 했다. 손가락을 많이 쓰지 않는 것 밖엔 방법이 없다고 했었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손을 많이 쓰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일 년 정도가 지나자 어딘가 내 몸 같지 않았던 몸도 제자리를 찾아갔고 손가락도 서서히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둘째를 갖는 사람들이 가장 흔한 이유로 꼽는 ‘망각’.

나 역시도 그 망각의 패턴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아이가 일어서고 걷기 시작할 때 문득문득 둘째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은 아이 둘로 쉽게 기울었지만 그럼에도 둘째에 대한 결심이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도 중국에 살고 있었는데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입덧 때문에 초기에는 한국에 들어가 있었다. 입덧은 다행히 오래가지 않아서 초기 검진들을 마치고 다시 곧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이후의 크고 작은 검진들은 모두 현지 병원에서 해야 했다. 그때 살고 있던 청도라는 도시는 북경이나 상해처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병원이나 의료시스템이 정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이었다. 원래는 투명한 빛을 띠었었을 누리끼리한 비닐 막을 열고 들어서면 곧이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병원 내부. 종합병원이었는데 산부인과로 배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대기하는 동안에는 회색  벽면과 때 묻은 파란 커튼 같은 것들을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도시의 모든 임산부들이 총집합한듯한 작은 복도에 끼여 앉아있다가  이름이 불렸을  벌떡 일어나 진료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약속이라도   나란히 앉아있던 임산부들 몇몇이 무거운 허리를 잡고 일어나 나란히 함께 진료실로 입장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옆에 바짝 붙어서 의사가 말해주는 나의 증상을 같이 끄덕끄덕하며 듣고, 나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나만 모르는 어떤 암묵적인 동의 같은 것들에 의해 자연스레 자매결연이라도 맺은 듯 그녀들의 일원이 어 있었다. 사생활 침해라고만 여겼던 그것이 사실은 엄연한 테두리가 있는 단체의식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우여곡절 끝에 출산을   남짓 남기고 한국의 친정집에 가있었을 때는  남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곤 했다. 출산하기 전날에야 남편은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건너왔고 3 후에는 회사  때문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말이다.

  친정부모님이 말씀하셨다. "자네는 운도 좋네~ 아기 키우기 제일 힘든   있어서" 거꾸로 말하면 나는 지지리도 운이 없었던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남들이 둘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고, 삼 형제로 자랐던 남편이 둘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냥 한쪽 귀에서 막아버렸다. 그렇게 묵어서 잊혀 버릴지도 몰랐던 둘째 고민이 확신으로 바뀌기까지는 생각보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찰나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즈음 친한 언니가 두 살 터울 조금 안 되는 둘째를 임신했고, 같은 아파트에서 같은 또래 아이를 키우며 왕래하고 지내던 엄마는 셋째를 임신했다. 셋째를 임신했던 그 엄마는 온라인에서 다양한 활동도 했었고 육아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다.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렸지만 옆에서 보기에 못하는 게 없어 보이는 엄마였다. 또한 그 집 첫째와 둘째 남매를 보면 예쁜 아이는 누가 봐도 예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곤 했었다. 그 엄마가 셋째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다들 입을 떡 벌렸지만 그녀는 고고한 듯 거침없이 담담했다. 그렇기에 아이 셋에 대한 그 엄마의 확신은 조금의 허구도 없는 진실로 느껴졌으며 그 고고한 찰나를 보며 나는 육아란 ‘준비된 자의 행복’ 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 나도 준비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나는 두 아이들의 엄마, 두 아들들의 엄마다. 준비해서 행복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가 없다. 하지만 둘이 있어서 더 행복 해졌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다. 행복이란 추상을 논할 만한 무엇인가가 있는 게 아니고, 둘이 있어서 밀도 있게 지지고 볶았기에 적당히 회피할 수 없었고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작은 불씨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단지 그뿐이다.


  평생 누군가로부터 투영받는 것에 대한 관심만 두었던 내가, 두 아이를 키우며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의지를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일, 엄마로서의 자리, 가족 안에서의 모든 관계가 결코 쉽지 않았던 날들.


아이가 둘이어서 좋았던 이유는 지금이라도 바로 하나하나 나열할 수 있고, 아이가 하나였으면 좋았을 점에 대해서도 물론 비교 관점에서 나열할 수 있다. 실제로 맨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그럴 요량으로 적기 시작했지만 쓰다 보니 더 이상 나열해야 할 의미를 찾지 못했다.

 

아마도 아이 둘 있는 집들은..

"아이 둘은 있어야지." "근데 너무 힘들어."

아이 하나인 집들은 또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아이 하나 낳아서 잘 키워야지." "근데 외로워 보여."


나 역시 지금까지 걸어온 짧은 여정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힘들었지만 아이 둘이라서 참 좋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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