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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Oct 24. 2021

단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엄마

톤 높은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묵직한 저음이 강의실에 울려 퍼진다. 섞이지 않는 목소리에 좌중이 조용해졌던 것도 잠시, 교수님의 한 마디에 다시금 강의실의 데시벨이 오른다.

“너희의 미래를 맞춰볼게.” 원래도 싱글벙글한 얼굴이 한껏 더 동그래지며 덧붙였다.

“졸업생들 보면 신기하게도 내가 맞춘 대로 되더라고.”

어리둥절해하며 입만 헤 벌리고 있는 우리들 중 앞자리 누군가가 재빠르게 손을 들었다.

“저요, 저는요?”

“음.. 너는 대기업 인사팀.”

교수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높은 웅성거림이 물밀 듯 밀려온다. 강의실은 어느새 점집의 열기와 젊음의 혈기로 가득 찼다.

“야, 우리도 좀 들어보자.” 나란히 앉은 우리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었다.

“자네는.. 기자. 기자가 될 것 같네.” 교수님의 눈이 나를 응시하는 그 몇 초간, 침이 꼴깍하고 넘어갔다. 똑딱, 꼴깍, 그리고 기자. 마음이 넘실대던 그때가 생생하다.

물론, 그건 여대 언론정보학부의 수업이었으므로 우리들의 진로는 꽤나 한정되어 있었다. 최소한의 경우의 수를 가진 확률 게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경우의 수 안에는 우리 모두가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던 단 하나의 수가 있었으니, 바로 ‘가정 주부’. 즉, ‘엄마’였다. 바로 옆에 앉은 친한 친구가 교수님으로부터 “너는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친구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친구는 사실 한눈에 보기에도 현모양처라든가 가정주부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짧은 커트 머리는 노랗게 탈색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낭랑하다 못해 찢어질 듯 귀에 들어와 콕 박혔다. 만약 그 친구가 아닌 나에게 ‘좋은 엄마’라는 미래가 점쳐졌다면 그 후폭풍은 우리 모두에게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수업이 다 끝난 후에도 그 친구는 “말도 안 돼.”를 연발했으며 우리 모두는 입을 모아 교수님 욕을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친구는 부산 바닷바람에 짧은 커트머리를 휘날리는, 멋진 아들 셋 엄마가 되어 있다.



꿈 많던 20대의 우리들에게, 엄마란 그런 것이었다. 아무도 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런 우리들에겐 ‘엄마’ 하고 부르면 달려올 엄마가 항상 곁에 있었다. 엄마도 꿈이 있을까? 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엄마 역시 엄마가 꿈이 아니었음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엄마는 산더미 같이 쌓인 저녁 설거지나, 빨랫감에 종종 날카로워지곤 하셨으며,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은 대부분 집 밖에 있었다. 그런 엄마를 보며 ‘엄마로만 산다는 것’은 어딘가 고된 일이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본 엄마는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었고, 나는 단 한 번도 엄마를 꿈꾸지 않았다.


뜬구름도 잡을 줄 몰라 희뿌연 바람만을 품은 채로 대학을 다녔고, 다행인지 졸업 전에 취직을 했다. 길이 보이면 없어질 새라 앞으로만 걸어왔다. 3년 후엔 연봉을 높여 이직을 했다. 내가 꿈꾼 그대로는 아닌 것 같았지만, 누군가에겐 꿈일지도 몰랐다. 불평은 사치였다. 나는 내 앞에 있는 간판에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었고 그건 겉에서 보기에 꽤 그럴듯해 보였으니까. 그러다 회사 안에서 만난 남편과 결혼을 했고 1년 뒤 중국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중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맞닥뜨린 곳은 그저 신세계였다. 나의 전직은 여전히 유효하게 나를 수식하고 있었으며, 중국어 어학코스에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어쨌든 나를 다시 안정적인 학생 신분으로 만들어줬다. 나를 수식할 수 있는 이름, 그것 없는 그냥 ‘나’로 세상을 마주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회사 다닐 때 내가 담당했던 브랜드의 광고주 한 분이 어느 날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도원 씨는 보면 못하는 게 없는데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좀 자신 있게 해 봐요.”

그때 나에게 꽂혔던 말은 ‘못하는 게 없다’ 보다 ‘자신이 없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나는 못하는 것 없는 나보다는 잘하는 것 없는 나를 바라봤다. 나의 눈으로 나를 보지 않았고 누군가의 눈에 비친 나를 들여다봤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 그랬다.


엄마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쉼 없이 달려오며 그럴듯한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세상 속에서 등 떠밀리듯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좇다가 엄마가 되었다. 더군다나 언제까지 중국에서 살게 될지,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뚜렷하게 알지 못했기에 손에 쥔 것들을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 있으니 중국어라도 배워야지, 아이는 너무 늦기 전에 낳아야지. 돌이켜보니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얼떨결에 한 손에 엄마라는 이름 하나만을 꽉 움켜쥐게 되었다.


예상은 언제나 조금씩 빗나가기 마련이지만, 엄마로서의 삶은 내가 예상, 아니 상상했던 것 그 이상으로 어긋났다. 아이는 엄마 이외의 어떤 모습도 나에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 만으로도 하루의 전부가 소요되었으며, 잠과 식사 등 때론 인간 생존의 기본이 되는 영역까지 내어줘야 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 텅 빈 집 안엔 아이와 나뿐이었다. 그때 나는 전에는 몰랐던 육체의 고통을 알게 되었으며,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상태의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이기적인가를 소름 끼치도록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봤을 때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서 한참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선 귀 밑으로 짧게 자른 머리부터가 문제였다. 애초에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릴 것 같아 라는 생각으로 자른 게 아니었다. “이 참에 짧게 잘라버려라.”라는 친정 엄마의 한 마디에 잘랐다. 임신 기간 동안 염색이나 파마를 하지 못해 지저분해진 머리를 보다 못해 하신 말씀이었다. 중국에서 미용실을 다니기도 마땅치 않을 터였다. 그렇게 하게 된, 파마나 염색 없는 생머리의 똑 단발은 중학생 이후 처음이었다. 조금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했는데 한참을 지나도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피부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일상의 전쟁이 고스란히 피부에 불붙어 있었다. 민감성 피부로 결혼 전에도 간혹 피부가 뒤집어져 고생한 적이 있었고 면역력이 떨어지는 환절기에는 꼭 트러블이 심하게 올라왔었다. 그럴 때면 두꺼운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곤 했었는데, 아이를 낳은 후엔 그런 피부 상태가 회복될 기미 없이 지속되었다. 얼굴빛은 혈색 하나 돌지 않았고 눈빛은 퀭했다. 이목구비는 분명 그대로였는데,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백화점에서 보았던 아기 엄마들이 떠올랐다. 하나같이 뽀얗게 빛이 나는 편안한 얼굴들. 남편은 조금 달라진 나에게도 여전히 예쁘다고 말해줬고 아이는 내 얼굴의 분화구에도 방긋방긋 웃음을 쏘아주었지만 나는 나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다 직격탄을 맞았다. 부모님이 아시는 한의원 선생님께 백일 지난 아이를 데리고 인사드리러 갔을 때였다. 나를 보자마자 그 선생님은 “어머, 자기 아닌 줄 알았다. 그렇게 대학생 같더니~ 애 낳으면 진짜 여자는 어쩔 수가 없어~.”라고 제 일처럼 속상해하시며 한약을 추천해 주셨다.


그날 부로 목구멍에 탁 박혀버린 무언가를 나는 쉽게 뱉어버릴 수가 없었다. 어찌할 수 없이 단단하게 박혀버린 그건 ‘나는 그 누구도 아닌 그냥 엄마’라는 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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