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가려고 퇴사한 28살, 아니 이제 29살, 여자 이야기
며칠 전 개인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입니다. 페이스북에서는 더 많은 '미어캣'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작가의 지난 글 읽기>
저, 세계여행 후 한국에 돌아왔어요.
샌프란시스코에서 쿠바를 거쳐 남미로 향할까도 고민했으나, 새로이 알아보고 싶어 진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남미 대륙에 대한 호기심보다 더 크더라고요.
저도 신기합니다. 살면서 여행보다 다른 게 더 하고 싶어 지는 때가 또 언제 오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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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에서 돌아온 날,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날 썼던 일기를 다시 읽어봤어요. 그중 마지막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난 고작 "세계일주를 꿈꿨었고, 그 꿈을 이뤘어요."라는 말 하나만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20대의 모습으로. 그래도 괜찮다. 그 한 문장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희로애락들이 농축되어 있으리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인생의 올바른 방향과 답을 찾겠다'며 떠났었지요. 떠나는 날 저의 베스트 트래블메이트가 저에게 써 준 말처럼, '지구 위 구석구석을 항해하며 다른 이들과 나누고도 남아 결국 혼자 평생을 안고 갈 이야기'들을 담아 왔지요. 근데, 사실 인생에 정답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답 같아 보이는 것' 몇 가지를 찾아 소중히 안고 돌아오긴 했지만, 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20대 후반일 뿐이죠.
그래도 괜찮아요.
'Connecting the dots'를 위한 '점'들을 듬뿍 찍어왔으니까요.
젊은 시절 직관과 호기심을 따라 다양한 것들에 매료됐고, 10년 후 되돌아보니 점처럼 찍어왔던 경험들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돼 있었다. (Connecting the dots)
-스티브 잡스 스탠퍼드대학교 졸업 축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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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대 내내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왔어요.
특출한 재능이 있는 것도, 전문성 있는 전공을 선택했던 것도 아니기에, 이 나이 먹도록 ‘나만의 분야’ 하나 없다는 것이 늘 콤플렉스였지요.
중어중문 전공과 전공했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의 중국어, 10개월의 미국 교환학생 경험과 딱 그 정도 수준의 영어, 기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깨달음을 준 학보사 경험, 대학에서 배운 것들과는 1도 관련 없는 업무를 수행했던 회사 생활...
이 일관성 없는 점들이 훗날 대체 어떻게 연결되려나, 연결이 되긴 하려나, 걱정도 했었죠.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참 신기해요.
그 점들이 모두 자연스레 연결돼, '세계여행'이란 선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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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0개월 교환학생 수준의 영어'와 '전공자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의 중국어'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여행을 즐기기에 충분했어요.
미국 교환학생에서의 경험들 덕분에 저는 행복이 꾸준한 자기 분석과 노력 끝에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이라는 걸 배웠지요.
짧은 중국 어학연수 경험은 여행 중 맞닥뜨리는 어떤 비위생적인 환경과 어떤 비매너를 갖춘 사람이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무던함을 익히게 해주었어요.
아프리카 해외봉사는 외면하고 지냈던 세상 구석구석으로까지 제 마음과 시야를 확장시켜 주었어요.
회사는 세상의 온갖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압축해서 겪게 해 준 ‘생생한 인생 학교’였어요. 단순한 ‘여행 수요자’로서가 아니라, 가끔 ‘여행 공급자’의 시각으로 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스승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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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를 가장 찬란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꿈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가면서, 움켜쥔 것은 한 움큼씩 버릴 줄 아는 용기를 내기 위해, 저는 그렇게 조금씩 단련해 왔었나 봐요. ‘꿈보다 해몽’이란 말을 이럴 때 쓰는 건진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그렇게 믿어요.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든 연관된다는 걸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이 여러분의 가슴을 좇아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모든 차이를 빚어낸다."
-스티브 잡스 스탠퍼드대학교 졸업 축사 中-
제 20대의 점들이 연결되어 만들어 낸 선, ‘세계여행’ 덕분에 저는 제 인생 그래프에 또 다른 수많은 점들을 찍을 수 있었어요.
레소토, 모로코, 제네바, 보스니아, 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울고, 웃고, 외로워하고, 감동하고, 때론 경이로워하면서 찍었던 점들. 말로 채 표현할 수 없이 벅차고 소중한 제 7개월의 경험들.
당장 내일일지, 1년 후일지, 10년 후일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온전히 이어져 번듯한 선을 긋게 되리라 믿는답니다.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부자가 된 듯, 참 든든하네요!
# 근황 1
다행히 저 '상백수'는 아니에요.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 온라인 PT/인터뷰를 하고, APAC 헤드쿼터와 계약해, 평소 좋아하던 글로벌 여행사의 프리랜서로 일하며 소소한 용돈 벌이는 하게 되었어요.
시공간의 제약 없이 일하며 돈 버는 '프리랜서', '디지털 노마드'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그 꿈에 반 걸음은 다가선 걸까요?
# 근황 2
여행 내내 가장 하고 싶었던 것, ‘나만의 공간에서 의식주 걱정 없이 책 읽다가, 매운 음식 흡입하고, 글 쓰고, 드러누워 자는 것’을 마음껏 하고 있어요. 떠나기 전에는 휴대성을 갖춘 여행용품들을 볼 때 설렜는데, 돌아오고 나니 ‘정착성을 띈’ 소소한 물건 (예를 들어 펌프 형 물비누)들이 참으로 깜찍해 보이네요.
# 계획
여행 중에는 누가 읽어주든 말든 저의 감상 나부랭이를 줄줄 써 올렸었지요. 이제는 좀 더 실질적인 내용이나 길에서 느낀 인생에 대한 고민 같은 걸 공유해 보려 해요.
(감상 나부랭이 에세이도 쓰긴 쓸 거예요. 그때 제가 제일 행복하니까요. 헤헤)
-퇴사와 연애의 알싸한 관계
-나는 왜 세계여행을 떠났는가?
-여행 후 내게 남은 것들
-네덜란드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
....
아마 이런 종류를 쓰게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