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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주용 JulieSim Oct 07. 2024

비전공자 유학생의 실리콘밸리 UX 디자이너 취뽀기(1)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초특급 벼락치기 여름 인턴십 구하기 프로젝트

전편 Ep 7. 내가 인생을 바꾸는 ‘선택'을 한 방법 (2)에서 제가 UX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전환하기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아트스쿨'에서 석사 과정을 하기로 결정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번에는 두 편에 걸쳐, 석사 과정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저의 실리콘밸리 UX 디자이너 취업기를 공유해 보려고 합니다.



7개월의 세계여행에서 ‘UX 디자인'이라는 실마리를 찾고 돌아와, 그 분야에 정말 뛰어들기로 결심하는 데만 3개월이 걸렸어요. 그 뒤, 어느 나라에서 어떤 석사 과정을 할지 결정하는 데는 3~4주가 소요됐죠. 

하지만 결정 후의 준비는 오히려 그 전의 고민보다 훨씬 수월했습니다. 당장 3개월 후 시작되는 샌프란시스코 아트스쿨의 석사 과정에 맞추기 위해 이력서,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 IELTS 성적표와 그 외 각종 서류들을 일주일 만에 후다닥 준비했어요. 


그리고 2017년 8월, 편도 티켓을 끊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이건 그때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썼던 글이에요.


제 세계여행의 종착지가 된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7개월 만에 다시 돌아왔어요.
그래요, 전 지금 '또다시!'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어요!  

(중략)

맞아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을 때 가장 편하고 안전할 거예요. 구하기도 어렵지 않고, 크게 탈이 날 염려도 없겠지요. 하지만 모든 송충이에게 그런 삶이 잘 맞는 건 아닐 거예요.

솔잎만 먹고도 평생 행복한 송충이도 있겠지만, 다른 잎을 끊임없이 찾아서 먹어 보고, 배탈도 나 보고, 사경도 헤매 보다가, 자신에게 딱 맞는 잎을 찾을 때의 그 짜릿함에 사는 송충이도 있을 거예요. 자신이 어떤 송충이인지 탐구하고, 그에 맞는 길을 개척해 나가는 건 온전히 그 송충이의 몫이겠지요.

적지 않은 나이에, 아무 백그라운드 없이, 전혀 다른 환경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보려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어요. 아마 현실은 제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녹록지 않을 테지요.

한 동안은 원하는 삶을 위한 과정 속을 살면서, 꽤나 초라하고 배고플 거예요. 
하지만 꿈이 있어 과정도 있는 인생이 꿈 없이 그저 살아내는 인생보다는 훨씬 살아볼 만하다고 믿기에, 그 모든 과정들까지 한 땀, 한 땀, 행복하게 즐기려고 합니다.

(전문: 솔잎을 거부한 송충이: 이제는 여행이 아닌 삶, 세계여행의 마지막 도시로 또다시 돌아오다.)


'또다시' 샌프란시스코 :)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 구절이 가장 눈에 띄네요.

‘아마 현실은 제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녹록지 않을 테지요.’


네… 2017년 9월 석사를 시작해서 2019년 7월, 마침내 한 회사에서 풀타임 UX 디자이너로 오퍼 레터(Offer Letter)를 받기까지, 그 1년 10개월은 정말이지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100 더 힘든 시간이었어요.


사실 그 기간이 ‘맨땅’에서 ‘풀타임 디자이너 취직’이라는 산꼭대기까지 오르기엔 더럽게 짧은 시간이었거든요. 아니, ‘맨땅’도 아니었어요. ‘비전공자 유학생’이었던 저는, 마치 맨틀 속, 지구의 가장 깊은 층에서부터 출발하는 기분이었달까요?


다시 한번 그 당시를 돌아보면, 제 상황은 이랬어요:  

    초중고대 모두 한국에서 나온 토종 국내파에,     

    문송한 중어중문학과 출신의 디알못(디자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데다가,  

    컴퓨터 오류가 한 번이라도 뜨면 당황해서 ‘Ctrl + Alt + Shift’부터 누르고 보는 컴맹이자 기계치   


그런 제가 앞으로 2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이뤄내야 하는 것은:  

    트럼프가 기존에 살고 있던 이민자들조차 쫓아내려고 생난리를 치는 흉흉한 판국에 (2017년 당시),   

    외국인으로서의 현실적 장벽이 매우 높은 미국에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생전 배워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Tech & Design 분야를 공부해서,   

    세계 각지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실리콘밸리에서,     

    이 바닥에서도 핫한 고소득 직종 중 하나인 UX 디자이너로서 취직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외국인에게 취업비자(H1B)를 제공할 수 있는 규모의 회사에서 말이죠.  

    그리고 이 모든 걸 학생 비자가 허용하는 짧은 기간 내에 이뤄내야 했습니다.  


차근차근 다시 적어놓고 보니, 현실과 목표 사이의 간극이 참 허무맹랑할 만큼 어마어마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때는 세계여행을 통해 얻은 '자기 긍정'과 ‘자기 신뢰'가 한창 뿜뿜 하던 때라 그런지, 꽤 긍정적인 빨간 머리 앤의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열심히 하면 2년이면 뭐든 배우겠지'라고 생각했죠. 학교 커리큘럼을 봤을 때 마지막 학기에 포트폴리오 수업이 있길래, '그때 포트폴리오 만드는 법 배우고 취직 준비하면 되겠다'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천진난만했는지는… 나중에 깨달았죠. 많이 늦게요...


가슴 시릴 만큼 예뻤던 샌프란시스코



석사 첫 학기 (9~12월) - 무지해서 해피해요


첫 학기가 9월에 시작됐고,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에 저는 처음으로 ‘디자인’이라는 분야를 공부하는 늦깎이 학생이 되었어요. 제가 선택한 석사 프로그램은 UX 디자인뿐만 아니라 프로그래밍(코딩), 사진, 모션 그래픽 등 다양한 '디자인' 과목을 포함하고 있었죠.


입학이 쉬웠고, 학비도 비교적 저렴했던 만큼,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질 높은 수업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학문을 위한 학문보다는 취업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있었어요. 실제 수업을 들어보니, 그 기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사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수업 커리큘럼을 보면 최소 2년 과정의 내용을 한 학기에 쑤셔 넣은 듯한 느낌이었고, 수업 시간에는 목차를 읽고 예시를 간단히 다루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다음 수업까지 해오라는 과제의 양은 어마어마했답니다. 그래서 과제를 하려면 인터넷 자료를 뒤지든, 온라인 강의를 따로 듣든, 스스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잠을 줄여가며 어떻게든 과제를 끝내다 보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알아서 야매로라도 익히게 되는 식이었죠.


중어중문학과 출신의 ‘디알못’인 저에게 디자인의 세계는 정말 새로웠어요. 한글 ‘바탕체’나 ‘궁서체’ 정도에서 선택할 줄만 알았던 저에게 ‘타이포그래피’라는 학문이 존재하고,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죠. 또한 ‘여백(white space)’이 디자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하나의 디자인 요소라는 것, 그리고 앱에서 버튼 하나 바꾸는 것도 그렇게 많은 고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그리드 시스템 덕분에 모든 화면 요소가 보이지 않는 선에 따라 정렬된다는 점도 새로웠고, 단순히 예쁜 색을 조합하는 것처럼 보였던 컬러 팔레트가 실제로는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고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들을 이제야 알게 되면서, 제가 전혀 모르고 살았던 ‘디자인’이라는 분야의 방대함과 심오함에 매일 놀라워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7명이 함께 2층 집을 통째로 렌트해 비용을 나누는 셰어하우스(Share House)에 살고 있었어요. (샌프란시스코는 렌트비가 비싸서 이런 형태의 주거가 흔하답니다.) 저를 제외한 모든 하우스메이트는 이미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테크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인들이었어요. 그들과 친해지면서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파티에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연말 시즌은 달마다 이벤트가 어찌나 많던지요. 화이트 엘리펀트 파티(White Elephant Party), 할로윈 코스튬 파티(Halloween Costume Party), 펌킨 카빙 파티(Pumpkin Carving Party), 땡스기빙 디너파티(Thanksgiving Dinner Party) 등을 빠짐없이 즐겼어요.


Pumpkin Carving Party


그러던 와중에, 하우스메이트 한 명과 연애까지 시작하게 되었어요. (이 이야기는 따로 풀어볼게요^^) 그 후로는 선셋 데이트, 남자친구 회사의 연말 파티, 크리스마스 파티 등 로맨틱한 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과제를 해내기도 벅찬 상황에서 연애까지 병행하다 보니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렸지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달콤한 첫 학기를 보내게 되었어요.


그런데… 네, 이래도 되는 게 아니었어요. 

‘무지하면 행복하다’고들 하죠. 때 저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모른 채 살고 있었던 겁니다. 사실 팔자 좋게(?)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요!!!




두 번째 학기 (2월) - 왜 나한테 아무도 안 알려줬지?


학교 생활과 소셜 활동, 연애 활동을 모두 성실히(?) 해내고 있던 중,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된 지 3주쯤 지났을 때 친구 티파니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줄리, 인턴십 준비는 잘 되고 있어?” 


아, 티파니는 UX 디자이너로, 저에게 UX 디자인의 세계를 처음으로 소개해주고, 이 셰어하우스에 들어오기 위한 면접 기회도 준 제 ‘인생의 귀인’이에요. 그녀는 십여 년 전 샌프란시스코 교환학생 프로그램에서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눴던 제 오랜 친구이기도 하죠.


그 질문에 저는 진짜로 시방 이게 뭔 소린가 했습니다. 

나 이제 겨우 막 석사 두 번째 학기 시작했는데? 아직 이력서도 없고, 포트폴리오는커녕, 포트폴리오에 넣을 프로젝트 할 시간도 없었는데, 벌써 인턴십 준비가 잘 돼 가고 있냐고??


당황해하는 저를 보고 더욱 당황한 티파니는 “특히 유학생 신분으로 석사 졸업 후 풀타임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는 석사 2학기를 마치자마자 여름 인턴십을 하는 게 거의 필수적이며, 그런 여름 인턴십은 보통 몇 개월 전에 지원 마감된다”는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줍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옆에 있는 다른 하우스메이트들을 바라보니, 그들 모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더라고요. 티파니와 하우스메이트들은 제가 고민했던 학교 중 하나인 '미국의 인지도 높은 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밟은 친구들이었는데, 그 프로그램에서는 심지어 인턴십이 졸업 필수 요건이었다고 하더군요.



그 순간, 저는 또 김치 싸대기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제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교수님들이든 동기들이든 아무도 '인턴십'이란 말을 꺼내지 않았어요. (결국 2배 이상의 학비와 네임 밸류의 차이는 이런 정보력 때문이었을까요...?)


당장 방으로 달려가 구글링을 해보니, 여름 인턴십은 보통 5-6월에 시작하는데,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큰 회사들은 이미 작년 11-12월에 여름 인턴십 지원을 마감했고, 많은 회사들은 1-2월쯤에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이 이미 2월 말이니, 저는 정말 안드로메다급으로 늦은 상황이었어요.


저는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제게 주어진 석사 과정 1년 10개월은 단순히 디자인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었어요. 이는 ‘졸업 후 바로 풀타임 디자이너로 취직하기'라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기 위해, 달 단위로 쪼개가며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었던 거예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첫 학기에 온갖 UX 디자인 이론과 디자인 툴들을 후딱 배워서 3-4개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첫 학기가 끝나자마자 최소 3-4개의 프로젝트를 포함한 온라인 포트폴리오와 이력서, 커버레터를 준비해 여름 디자인 인턴십 포지션에 지원하고,

    두 번째 학기가 끝나자마자 여름방학 내내 열심히 인턴십을 하고,   

    세 번째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학교 수업과 병행하며 인턴십 프로젝트를 포함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각종 디자인 인터뷰를 준비하고 풀타임 포지션에 미친 듯이 지원해서 졸업 전후로 최종 오퍼까지 받아내야 하는...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짧은 시간이었던 거예요.


학교 수업만 잘 따라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무지하고 순진했던 저는, 달 단위로 쪼개가며 보내야 하는 이 짧은 1년 10개월 중 이미 6개월을 정말 성실하게 과제에만 매달리며 보내버린 것이었죠


‘왜 나한테 아무도 안 알려줬지?’라며 대상도 없는 원망을 할 시간조차 없었어요. 

저는 3월 안에 이력서,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 인터뷰 준비를 모두 마친 후, 4월부터는 여름 인턴을 늦게 뽑기 시작하는 회사들에 보이는 대로 지원해야겠다초특급 벼락치기 인턴십 구하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됩니다.




두 번째 학기 (3~4월) - 초특급 벼락치기 여름 인턴십 구하기 프로젝트


그날 이후로 취업이 확정될 때까지의 여정은 주욱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특히 그 3월과 4월은 인생에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미국에서 UX 디자이너로 취직하기 위한 인터뷰 프로세스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돼요. (더 자세한 내용과 팁은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루려고 합니다.)



1단계: 지원 (Apply): 
구직 사이트나 내부 추천을 통해 이력서,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를 제출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포트폴리오가 중요합니다. 지원자의 경력, 디자인 능력, 프로젝트 경험 등이 평가되죠.


2단계: 전화 인터뷰 (Phone Interview): 

주로 인사팀이나 채용 담당자가 지원자와 짧은 인터뷰를 진행하며, 기본 자격과 회사 문화에 적합한지를 확인합니다. 이후 팀원이나 상사와의 추가 전화 인터뷰가 이어지며, 이때는 포트폴리오를 함께 보면서 디자인 프로세스와 문제 해결 방식을 평가받습니다.


3단계: 디자인 챌린지 (Design Challenge): 

특정 디자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를 받습니다. 여기서는 주어진 시간 안에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과 논리적 사고가 중요하게 평가됩니다. (주어진 시간은 제가 경험한 바로는 3시간에서 일주일까지 회사마다 다양하더군요.)


4단계: 온사이트 인터뷰 (Onsite Interview): 

최종 인터뷰는 주로 회사에 직접 초대돼서 진행됩니다.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함께 일할 팀원인 프로덕트 매니저, 엔지니어가 참석해 디자인 과제와 포트폴리오 발표를 듣고 추가 질문을 던지죠. 실시간 문제 해결 능력을 확인하는 화이트보딩이나 앱 크리틱 같은 인터뷰 방식도 자주 등장합니다.

화이트보딩 (Whiteboarding): 
지원자가 실시간으로 주어진 문제를 화이트보드에 직접 해결하는 방식으로, 해결 과정을 설명하고 스케치하는 능력을 평가합니다.

앱 크리틱 (App Critique): 
지원자가 기존 앱을 분석하고 UX/UI 관점에서 개선점을 제안합니다. 이는 지원자의 사용자 중심 사고와 개선 능력을 평가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도 없는 상태에서 단 한 달 안에 준비해야 하다 보니, 눈을 뜨고 있는 시간 내내 디자인에 매달려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수업과 과제는 ‘F’를 받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시간만 투자하고, 나머지 시간을 전부 인턴십 준비에 쏟아야 했어요. 열심히 해도 따라가기 벅차서 잠을 줄여가며 했던 과제들에, 더 적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F’는 면해야 한다니… 그 압박감에 정말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어요.


매일 평균 2~3시간씩 자며 맥북 앞에 앉아 있었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런 눈물 때문에 스크린이 보이지 않으면 억지로 닦아내고 다시 작업했죠. 지쳐 잠이 들면 악몽을 꾸고, 3시간 뒤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 학교에 가는 일상이 반복되었습니다. 아토피가 심한 저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온몸에 아토피와 각종 알레르기성 감염이 도지면서 권장량보다 훨씬 많은 스테로이드를 먹고, 발라야 했고, 제 몸은 정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어요.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실제로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야 겨우 하루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 상황을 제가 좋아하는 햄버거에 비유하자면, 고급 수제버거집에서 시원한 맥주와 함께 패티의 육즙을 음미하며 먹는 것까진 꿈도 꾸지 않았지만, 그래도 패스트푸드점에서 플라스틱 쟁반에 담긴 햄버거를 조금 밍밍한 콜라와 함께 먹을 수는 있을 거라 기대했던 거예요.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빨리 많이 먹기 대회’에 나와서 물 한 모금 마실 시간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햄버거를 닥치는 대로 입안에 욱여넣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런데도 대회 참가자들 중 제가 가장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끔찍했던 3월을 보내며 인턴십에 지원하기 위한 아주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뒤, 4월부터 본격적으로 여름 인턴십에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들어보는 도시들에 있는 회사들은 물론, 채용 공고를 올리지 않은 회사나 미술관, 박물관 같은 곳까지… 정말 닥치는 대로 지원했어요. 무려 300곳에요.


예상대로 디자인 관련 졸업장도 경력도 없고, 학생 티가 팍팍 나는 포트폴리오에, 학생 비자 신분인 저에게 관심을 갖는 회사는 거의 없었어요. 4월 말 기준으로, 300곳 중 단 두 곳에서만 연락이 왔습니다. A사는 미국 동부에 있었는데, 폰 인터뷰 몇 번 하고 나서 소식이 끊겼고, B사는 샌프란시스코 Bay Area에 있었는데, 6개월 이상 근무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찾는다는 조건 때문에 더는 진행할 수 없었어요.


다음 달부터는 대부분의 여름 인턴십이 시작될 텐데… 저는 극도로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해무(海霧)가 가득했던 Pacifica, CA



내게 내려온 단 한 개의 동아줄


여름 인턴십을 진짜 포기해야 하나 절망하던 4월이 끝자락,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C사에서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그 회사는 주문형 배달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사용자가 온라인으로 식료품이나 일상용품을 주문하면 등록된 쇼퍼가 물건을 구매해 배달해 주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죠.


이메일의 내용은 제 지원서를 검토한 후, 다음 단계 인터뷰에 초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전화 인터뷰'가 아닌 ‘비디오 인터뷰’라는 처음 접해보는 형식이었어요. 두 가지 주요 질문이 포함된 설문지에 대한 저만의 답을 직접 녹화해 제출하는 방식이었죠.


이 기회는 정말 저에게 내려진 마지막 동아줄이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틀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대본을 작성하고, 수차례 연습한 후 영상을 녹화해 제출했어요.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말로만 듣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3단계: 디자인 챌린지’에 초대되었다는 소식이었죠.

과제는 ‘온보딩 경험 디자인 (Design an on-boarding experience)’과 ‘체크아웃 플로우 리디자인 (Redesign a checkout flow)’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고, 일주일의 데드라인이 주어졌습니다. 저는 논리적인 사고 과정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 두 번째 주제를 선택했고, 일주일 동안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잠만 자면서 그 과제에 올인했어요. 마감 전날,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몰골로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부은 과제를 제출하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죠.


과제를 제출한 다음 날, 또다시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제 작업이 인상적이었다면서 마지막 단계인 '4단계: 온사이트 인터뷰'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어요. 3일 뒤에 있을 최종 인터뷰에서 사용할 1시간 분량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오라는 요청과 함께요.


‘와 드디어! 내가 미국 UX 디자인 채용 프로세스의 모든 단계를 경험해 보는구나!’라는 감격도 잠시. 엄청난 불안이 밀려왔어요. 사실 저는 인터뷰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거든요


실시간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화이트보딩'이나 '앱 크리틱' 같은 인터뷰는 물론, ‘너의 최대 장점이 뭐니?’, ‘가장 성공적인 UX 디자인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해 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였어?’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도 영어로 막힘없이 매끄럽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제가 아직 인터뷰 준비를 못 해서요’라고 하며 미루거나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남은 3일 동안 준비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준비를 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첫 온사이트 인터뷰 날이 밝았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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