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까, 말까?' 질문에 접근하는 나만의 세 가지 방법
27살, 한국에서 평범한 중어중문학과 출신 기획자로 살던 제가 30살, 실리콘밸리에서 UX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살게 되기까지, 제 내면에는 꽤 크고 진지한 물음표들이 몇 가지 떠올랐어요.
1. 내 꿈은 서른 전에 해외 취업을 하는 거였는데, 나 왜 아직도 한국 직장인으로 살면서 팀장님 퇴근 시간 눈치나 보고 있지? 퇴사할까, 말까?
2. 더 늦기 전에, 더 넓은 세상에서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어. 그래서 내 삶의 방향을 찾고 싶어. 세계여행 갈까, 말까?
3. UX 디자인, 내가 전혀 모르던 세계지만 너무 끌려. 서른이 다 되어가는 지금, 완전히 새로운 분야로 커리어 전환을 시도해 볼까, 말까?
4. UX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전환하려면, 어느 나라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까?
5. 그렇다면 그 나라에서는 어떤 학교에서 석사를 해야 할까?
이 물음표들을 모아 보니,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었어요.
첫 번째는 ‘할까, 말까?’라는 선택 자체에 대한 고민이에요. 무언가를 시도할지 말지, 즉 행동 여부에 대한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1. 퇴사할까, 말까?’, ‘2. 세계여행 갈까, 말까?’ ‘3. 커리어 전환을 시도해 볼까, 말까?’가 여기에 해당했죠.
두 번째는 ‘어디로? 어떻게?’라는 구체적인 실행 방향에 관한 고민이었어요. 4번과 5번처럼 커리어 전환을 마음먹은 후, 어느 나라에서 이 경로를 이어갈지, 어떤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이 부류에 속해요. 이미 마음속에 몇 가지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고, 아예 선택지부터 만들어내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죠.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에 더 실망하게 될 것이다.”
– 마크 트웨인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후회한다.”
– 버지니아 울프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시도하고 실패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이처럼 많은 대단하신 분들이 모두 ‘할까, 말까?'에 대한 질문에 ‘하는 게 후회가 적다!'를 외쳤다고 해요.
하지만 이런 말들은 아무리 봐도 ‘아,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명언이구나'하고 말지, 딱히 우리 마음에 와닿지는 않잖아요. 제 마음에 진짜 깊이 꽂힌 이야기는 바다 건너 옛 사상가들보다는 옆 나라의 작가에게서 나왔습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실험실 같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재시도를 할 수 없는 1회로 한정된 실험실이므로, 데이터를 충실히 쌓아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제대로 된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목표를 정하고 데이터를 축적하는 편이 좋겠지요. 아무튼 자신의 몸으로 실험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 중
‘나’라는 실험실에서 데이터를 부지런히 축적해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하루키 작가의 이 말은, 왜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나은지에 대한 이유를 저에게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어요.
그래서, (여태까지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은 이미 답을 알고 계시겠지만,) ‘1. 퇴사할까, 말까?’와 ‘2. 세계여행 갈까, 말까?’에 대한 제 선택은 ‘퇴사하자'와 ‘세계여행 가자'였어요. 퇴사는 세계여행을 떠나기 위한 필수 결정이었고, 두 선택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죠.
그리고 ‘3. UX 디자인으로 커리어 전환을 시도해 볼까, 말까?’라는 질문은 세계여행을 하던 중, 제 내면에 새로이 두둥실 떠오른 물음표였어요. 샌프란시스코 Ocean Beach를 산책하다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해 보자"로 내리게 되었고, 나를 찾기 위해 떠났던 세계여행은 그렇게 새로운 목표와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관련 글: Ep 05. 7개월의 나 홀로 세계여행 후, 내게 남은 것)
물론,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에 동의한다고 해도, 이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요?
이런 고민들은 각자의 복잡한 사정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딱 맞는 ‘보편적인 방법’은 아마 없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은 ‘인생의 큰 선택’을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저만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인생을 바꾸는 선택을 했는지 한 번 공유해 보려고 합니다.
인생을 바꿀 만한 큰 선택의 첫걸음은, 바로 선택의 시점이 왔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현재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죠.
바꾸기 (Change it):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변화를 시도해 보기
받아들이기 (Accept it):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의 평화를 찾기 (저항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 오히려 더 건강한 마음 상태로 이어질 수 있음)
떠나기 (Leave it): 상황을 바꿀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면, 과감히 떠나거나 새로운 길을 찾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현실적인 이유에서든, 혹은 귀차니즘이나 절박함의 부족 때문이든,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내 삶은 왜 이 모양일까?’라고 불평하며 매일을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을 거예요.
20대 후반 즈음 나이의 제가 그랬어요. 해외취업이나 세계여행 같은 큰 꿈을 품고 있는데, 현실은 한국 직장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아가는 제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한국 사회생활이란 게 다 이런 건가 보다’, 입 닥치고 웃으면서 견뎌보려 했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이런 건 웃고 못 넘기겠다 싶어, 반항하며 바꿔보려고도 했지요. 하지만 뼛속까지 군대 문화와 헝그리 정신이 박혀 있는 한국의 거대한 ‘사회생활’ 시스템 속에서 신입사원 하나가 무언가를 바꾼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죠. 결국 받아들일 수도, 바꿀 수도 없었던 저의 마지막 선택지는 ‘떠나기'였답니다.
현재의 상황을 떠나거나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할 때가 왔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큰 선택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결국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게 되겠죠.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은 후, 그다음으로 우리 발목을 잡는 건 무엇일까요?
저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인생에서 헷갈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법륜 스님의 가르침을 찾곤 해요. 이건 법륜 스님의 책 <행복>에 나온 일화입니다.
어떤 사람이 뜨거운 불덩어리를 들고 "뜨겁다!"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제가 "그냥 내려놓으세요"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어떻게 놓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진짜 방법을 몰라서 놓지 못하는 걸까요? 사실 그는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강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다시 "어떻게 내려놓아요?"라고 묻고, 불교가 어려우며, 현실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저는 "오른손으로 옮겨보세요"라고 제안합니다. 그는 얼굴이 환해지며 "왜 이제야 이런 좋은 방법을 알려주냐"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일시적인 해결일 뿐, 금세 오른손이 뜨거워져 또 아우성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놓고 싶지 않아서 불덩이를 계속 움켜쥐고, 뜨거운 상황에서 잠시 피하려고만 합니다. "놓아라"는 말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며,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기라는 방법이 오히려 좋다고 여기지만, 결국 다시 뜨거워집니다.
이런 경우,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그냥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살아온 습관 때문에 순간적으로 움켜쥐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놓는 것을 아는 사람은 괴로움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님이 말한 ‘불덩어리'는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것을 제 상황에 빗대어 ‘미련'이라고 해석했어요.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하자'라는 결정을 내린 순간, 우리가 움켜쥐고 있던 무언가를 놓아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망설이게 만들어요. 우리는 대개 선택을 할 때, 장점만 쏙 갖고 싶고, 그에 따른 단점은 감당하기 싫어하잖아요.
제가 퇴사를 결심하고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늘 ‘사회적 알람’에 맞춰 살아온 제가 처음으로 ‘정상 궤도’를 벗어나는 결정이었고, 쥐고 있던 커다란 ‘불덩어리'를 놓아버려야 하는 일이었죠. 처음에는 저도 ‘미련'을 주렁주렁 달고 머뭇거렸어요.
‘내가 생각했던 세 가지 조건에 딱 맞는, 이 정도면 괜찮은 직장인데…’
‘여기서 정든 사람들도 참 많은데… 다른 회사 얘기 들어보면 내 상사들도 나름 괜찮은 편인 것 같은데…’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이 주는 자유가 쏠쏠했는데…'
이런 고민은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거예요. 방송작가로 전업하고 싶지만 2년째 결심을 내리지 못하는 건, 현재 7년 차 회계사로서 받는 연봉을 포기하고 밑바닥부터 시작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겠죠. 더 이상 사랑하지도 않는 것 같은 사람을 4년 동안 계속 붙들고 있는 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면 한숨부터 나오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깐깐해서, 갖고 있는 무언가를 내려놓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무언가를 주지 않아요.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것처럼, 삶에서 무언가를 원한다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내놔야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가게에서 돈 안 내고 물건 낚아채 도망가면 나쁜 놈이란 건 잘 알면서, 정작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갖고 있는 걸 쉽게 내려놓지 않고 새로운 걸 얻고만 싶어 하는 도둑놈 심보를 보이곤 해요.
우리는 눈을 질끈 감고 움켜쥐고 있던 ‘불덩어리’를 내려놓을 용기를 낼 때,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어요.
움켜쥐고 있던 걸 놓아버린 후에는 또 어떤 장애물이 있을까요?
바로 ‘두려움'일 거예요. 내가 이렇게 과감히 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것이 내 손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함은 너무나 두렵죠.
제가 퇴사하고 나 홀로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당연하게도 형언하기 힘들 만큼 많은 두려움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어요.
IS 테러에, 지카 바이러스에, 뉴스에서는 무서운 소식만 잔뜩 들리는데, 나,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여행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행이 싫어지면 어떡하지? 이주만에 돌아와 버리면 쪽팔리겠지?
나 홀로 여행인데, 여행 중 다치거나 아프면 어떻게 하지?
세계여행을 떠났는데도 내가 원하는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하면 어떡해?
통장 잔고는 바닥나고, 나이만 먹은 채로 돌아와서, 지금보다 더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되면 어떡하지?
또한, 제가 세계여행을 다행히 죽지 않고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후, UX 디자이너로서 해외 취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두려웠어요.
왜냐하면 저는
초중고대 모두 한국에서 나온 토종 국내파에,
문송한 중어중문학과 출신의 디알못(디자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데다가,
컴퓨터 오류가 한 번이라도 뜨면 당황해서 ‘Ctrl + Alt + Shift’부터 누르고 보는 컴맹이자 기계치였으니까요.
그런 제가
외국인으로서의 현실적 장벽이 매우 높은 해외에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생전 배워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Tech & Design 분야를 배워서,
핫한 고소득 직종 중 하나인 UX 디자이너로서 직업을 구하기에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터무니없이 넓었으니까요. 당연히 오금이 저릴 만큼 두려웠죠.
하지만 오금이 저린 채로 끝나버린다면, 그 두려움은 결국 내 안에 그저 또 다른 ‘두려움’으로 남고, 나는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거예요.
제가 한창 두려움에 잠식되어 있을 때 썼던 일기가 있어요.
‘열쇠 없는 집’에 있는 것과 같다.
단순히 집을 나가고 싶다는 답답함만으로는 부족하다.
집에서 느끼는 안락함과 편안함에 대한 아쉬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불안감…
집 밖의 들짐승에게 잡아먹히거나 절벽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바깥세상에 대한 갈망이 이 모든 감정들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커질 때, 비로소 이 문을 박차고 나갈 수 있다.
결국 두려움을 극복하는 획기적인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래서 두려움을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그 수많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 얼마나 큰지, 스스로를 설득하는 방법으로 접근했답니다.
나는 누구이고, 그래서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너무도 절실하게 제 삶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 싶었고, 그 절박함과 간절함이 두려움을 훌쩍 넘어서는 날, 마침내 “세계일주 가자”라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어요. (제 예전 글 Ep 04. 퇴사 후 나 홀로 세계여행, 그 ‘진짜’ 이유를 참고해 주세요.)
그렇게 떠난 7개월의 나 홀로 세계여행에서 발견한 ‘실마리’ 중 하나가 바로 ‘UX 디자인’이었습니다. 그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수백 가지 두려움을 압도하는 순간, 저는 “커리어 전환을 시도해 보자”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답니다.
결국, 나의 호기심과 간절함, 절박함이 자라고 자라서 두려움보다 커질 때, 우리는 비로소 두려움을 넘어서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여기까지 ‘할까, 말까?’에 대한 선택을 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았어요.
(1) 선택의 시작: 변화가 요구되는 순간 인지하기
(2) 선택의 장애물 1: 움켜쥔 걸 놓아버릴 용기
(3) 선택의 장애물 2: 두려움 넘어서기
무언가를 시도할지 말지에 대한 선택 하나를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고민해야 하는 일인가 싶지만…
그 지난한 과정을 오롯이 거친 나만의 선택 하나하나가 모여,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나만의 자랑스러운 ‘삶'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인생의 큰 선택을 앞둔 분들에게 제 경험과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는 맨 위에서 설명드린 두 가지 물음표의 유형 중 ‘두 번째 유형: ‘어디로? 어떻게?’라는 구체적인 실행 방향에 관한 고민’
UX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전환하려면, 어느 나라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까?
그렇다면 그 나라에서는 어떤 학교에서 석사를 해야 할까?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