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회사와 비교한 '미친듯한 자율성'
미국에서 살면서 가끔 한국에 갈 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세 가지 있습니다.
1. "미국에서 산 지 벌써 오래됐네! 이제 영어는 완전 원어민처럼 하겠다, 그치?"
2. “너 진짜 억대 연봉받아?”
3. “실리콘밸리 회사는 한국 회사랑 진짜 그렇게 달라?”
1. "미국에서 산 지 벌써 오래됐네! 이제 영어는 완전 원어민처럼 하겠다, 그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전 글 Ep 11. 실리콘밸리 6년 차 디자이너의 '진짜' 영어 실력에서 했습니다.
2. “너 진짜 억대 연봉받아?”
이에 대해서는 Ep 10. 비전공자 유학생의 실리콘밸리 UX 디자이너 취뽀기(3)에서 답변했어요.
3. “실리콘밸리 회사는 한국 회사랑 진짜 그렇게 달라?”
이 부분은 아직 제대로 답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이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3년 차 기획자로 일하다가 퇴사했고,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6년 차 UX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어요. 양쪽에서 밥벌이를 해본 경험이 있으니, 실리콘밸리의 회사 생활은 한국의 회사 생활과 어떻게 다른지 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 볼게요.
이전에 Ep 9. 비전공자 유학생의 실리콘밸리 UX 디자이너 취뽀기(2)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6년 전, 3개월의 인턴십 후, ‘처음 글로벌 환경에서 일해본 소감’은 한 마디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정말 다르면서도, 결국 어디나 똑같다.’
정말 달랐어요.
저는 직장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직장 문화는 한국에서의 문화와 너무나 달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꼬꼬마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한국에서 배웠던 ‘사회생활’과 반대인 경우가 많아 더욱 혼란스럽기도 했죠. 여기서는 회의 시간에 고개를 끄덕이며 상사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예의 있는 직원이 아니라, 자기 의견이 없는 소극적인 직원으로 비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 늦게 퇴근하는 것이 성실함이 아니라 제시간에 일을 끝내지 못하는 무능력함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런데 또 정말 어디나 똑같았습니다.
적응 기간이 지나고 나니, 일이 힘든 것보다 사람 간의 관계가 가장 힘든 건 어디서나 마찬가지더라고요. 가장 걱정했던 디자인 스킬 자체는 어떻게든 키우고 익숙해질 것 같았지만, 상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다른 팀과의 책임 떠넘기기 줄다리기, 그리고 동료들과 친해지되 여전히 ‘직장’ 동료임을 잊지 않으면서 모든 루머로부터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균형을 찾는 것… 결국 가장 힘든 건 그렇게 사람과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실리콘밸리에서 오랜 시간 일해본 소감'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결국 이 말로 귀결되는 것 같아요.
'미친듯한 자율성, 그리고 그에 따른 미친듯한 책임감'
우선, 출퇴근 시간이 굉장히 유연합니다. 한국에서처럼 8시 땡 치기 전에 사원증을 리더기에 찍느라 과장님 차장님 다 같이 아침 댓바람부터 만원 엘리베이터에 몸을 구겨 넣거나 미친 사람처럼 계단을 뛰어 올라가지 않아도 돼요. 퇴근 시간이 훌쩍 넘어도 집에 갈 생각이 1도 없어 보이는 팀장님을 한 시간째 흘끗 쳐다보며 ‘5분만 더 기다려볼까?’ 아니면 ‘지금 당장 인사하고 먼저 퇴근해 버릴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으로 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도 없죠. 내가 몇 시에 들어오고 나갔는지 감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일하는 장소에 대한 제약도 없어요. 저는 COVID-19 발발 전 1년 반 정도 오피스로 출퇴근했는데, ‘자기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일하는 것'이 디폴트였던 한국 회사의 분위기와는 너무 달라 처음엔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나요. 여기서는 미팅 시간에만 제대로 참석하면 그 외의 시간에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안마 의자가 있는 마사지룸에서 반쯤 누워서 일을 해도 되고, 원한다면 회사를 관통하는 슬라이드를 무한 반복으로 타면서 일할 수도 있죠. 사내 게임룸에서 탁구를 한 판 쳐도 좋고, 햇빛이 그리운 날에는 공원 산책을 하고 와도 돼요.
2020년 초 COVID-19 락다운 이후, 저희 회사는 100% 재택근무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그 후로는 정말 말 그대로 어디서든 일할 수 있게 되었어요. 작년에는 샌프란시스코를 베이스로 하여 업무용 노트북 하나만 들고 8개국, 20여 개 도시를 여행하며 일을 할 수 있었답니다.
휴가를 내는 것도 정말 자유로운 편이에요. 아프면 간단히 “오늘 일어났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 병가 내고 내일 내 상태를 말해줄게.”라는 이메일을 보내면 됩니다. 한국에서처럼 아파 죽을 것 같아도 기어서 출근한 사람한테 “회사에서 아픈 놈은 죄인이야”라며 인간미 밥 말아먹은 멘트를 날리는 상사는 당연히 없죠.
여긴 심지어 “내일 아내 생일이라 나파밸리로 와이너리 투어를 갈 거야. 그래서 회사 못 나가. Cheers!”라는 쿨내 나는 이메일에 “우와, 역시 당신은 로맨틱 가이. 즐거운 여행하고 돌아와!”라는 칭찬과 격려의 답장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에요.
특히 제가 있는 회사는 무제한 유급 휴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무제한이라고 해도 정말 흥청망청 쓰면 뒷감당을 해야겠지만, 일 년에 1~3회 정도 2~3주 휴가를 내고 고향을 다녀오거나 여행을 가는 코워커들을 흔히 볼 수 있어요.
이곳에서는 누구도 나이와 경력을 무기로 저에게 명령하거나 복종을 강요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흔히 겪어봤을 법한 일들이 여기서는 반신반의 조롱거리로 통합니다. 마치 우리가 “북한에서는 이런대.”라고 하며 반신반의하는 것처럼요.
“Boss가 퇴근할 때까지 아무도 퇴근을 못한다고? Are you serious? North Korea만 그런 거 아니었어?”
“퇴근하고 해피아워 가서 술 마시는 게 강제적이라고? 도대체 노는 걸 왜 강제로 하라고 해? 변태야?”
“가라오케에 가서 남자 boss가 여자 직원한테 은근히 K-pop 노래를 부르게 한다고? 그 사람 성희롱으로 안 잡혀갔어? It’s super disgusting!”
한국에서 첫 회사 생활을 시작하며 저런 것들이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한국 사회생활'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던 저에게, 이곳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처음에는 거의 ‘역문화충격' 수준이었답니다.
이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직급에 상관없이 평가가 양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었어요. 이곳 실리콘밸리에서는 매니저만 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매니저를 평가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매니저 리뷰'를 제출하라는 이메일을 받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어요. 한국에서 ‘상사’라는 개념은 입사부터 퇴사까지 한 순간도 예외 없이 ‘내 위에 군림하는 슈퍼 갑'이라는 이미지였기 때문에, “너의 보스가 잘하고 있는 부분과 개선해야 할 부분을 평가하라”는 말은 거의 민중 봉기를 선동하라는 것처럼 느껴졌죠. 처음에는 정말 개선점을 쓰면 혹시나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손을 덜덜 떨면서 최대한 두리뭉실하게 작성했지만, 이제는 개선점이 있다면 솔직하게 써냅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피드백이 서로의 성장과 팀의 발전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에요.
직속 매니저뿐만이 아닙니다. 내 매니저의 매니저도, 나보다 경력이 훨씬 더 많은 엔지니어나 프로덕트 매니저도 피드백을 주고받는 대상입니다. 그 말은 즉, 저도 그들에게, 그리고 이제 막 들어온 신입 팀 멤버에게 똑같이 평가를 받는다는 뜻이죠.
한국에서는 상사와 '정기 면담'이란 걸 한 기억이 없어요. 팀장님과 저의 의사소통은 대개 “이게 필요하니까, 이때까지 해줘.” 같은 반강제적인 명령으로 이루어졌죠. 저에게 한국 회사에서의 상사는 보통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내가 무조건 잘 보여야 하는 사람', ‘찍히지 않게 비위 맞춰야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였습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매주 1:1로 매니저와 면담하는 시간이 있어요. 처음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사실 이게 대체 뭘 하는 시간인지 잘 몰랐어요. 한국에서는 면담이 주로 심각한 일이 있을 때 진행되곤 했기 때문에, 도대체 왜 매주 30분씩이나 이런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 의아했었죠. 처음에는 제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시간으로 알고 괜히 긴장하며 억지로 뭔가를 준비해 가기도 했었어요.
알고 보니 이 시간은 정말 아무 얘기나 캐주얼하게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답니다. 보통 매니저가 묻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아요.
"How are you doing?"
"What’s bothering you and how can I help you solve that?"
"What's your goal and how can I help you achieve that?"
이렇게 내가 힘든 것을 공유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는 사람,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공유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서포트해 주는 사람이 바로 매니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매니저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내 편'이라는 개념이 강해요.
한국에서는 나이와 근속연수에 따라 예상되는 직급이 비교적 명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물론 회사의 규모와 업종, 개인의 성과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대개 신입사원으로 시작해 2~3년 정도 일하면 대리, 3~5년 정도 일하면 과장으로 승진하는 식이었죠.
그리 길지 않은 한국에서의 회사 생활이었지만, 이러한 시스템이 여러 애로사항을 낳는 모습을 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어요. 먼저, 채용 시 ‘나이’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능력이나 자격보다 나이가 최우선시되는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죠. 예를 들어, 제가 한국에서 일할 때 팀장님을 도와 인턴을 뽑은 적이 있는데, 팀장님의 첫 지시는 팀의 막내보다 더 어린 지원자만 필터링하라는 것이었어요. 인턴이 더 ‘낮은 직급’으로 인식되다 보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인턴으로 뽑힐 경우 팀 내에서 어색한 상황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죠.
또한, ‘몇 년 일하면 어느 직급에 올라야 한다’는 통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승진을 원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승진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어요. 누구나 ‘저 나이에 아직도 저 직급이래'라는 수군거림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게다가, 능력이나 열정이 부족한 사람이 단순히 오래 버티며 일했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경우도 흔하디 흔했죠.
반면, 실리콘밸리에서는 내가 성장하고 싶은 방향과 속도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희 팀에는 회사 디자인팀의 초창기 멤버일 정도로 경력이 많은 디자이너 A가 있어요. 그는 매니저로서 다른 디자이너들을 관리하기보다는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는 IC(Individual Contributor)의 역할을 더 선호하여, 계속 IC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반면, 저희 팀의 다른 디자이너 B는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매니징 역할에 관심을 보였고, 능력과 열정을 인정받아 매니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요.
이렇듯 이곳에서는 꼭 오래 일했다고 매니저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짧게 일했다고 해서 매니저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의 선호와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점이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여기까지 “미친듯한 자율성, 그리고 그에 따른 미친듯한 책임감” 중 “미친듯한 자율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어서 “미친듯한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