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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주용 JulieSim Oct 19. 2024

실리콘밸리가 마냥 좋을 것 같다는 착각

한국 회사와 비교한 ‘미친듯한 책임감'

전 글 Ep 12. 실리콘밸리는 직장인들의 디즈니랜드? 진짜일까? 에서, 제가 ‘실리콘밸리에서 6년 차 디자이너로 일해본 소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결국 ‘미친듯한 자율성, 그리고 그에 따른 미친듯한 책임감'이라고 말씀드렸죠. 


이전 글에서 다룬 ‘미친듯한 자율성'을 다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진짜’ 자유로운 업무 환경
(1) 유연한 출퇴근
(2) 제약 없는 업무 공간
(3) 자유로운 휴가

2. 진짜' 수평적인 조직 문화
(1) 진정한 평등 관계
(2) 위아래 없는 평가
(3) 내 편인 매니저

3. ‘진짜' 선택 가능한 방향과 속도


이번 글에서는 이 자율성에 따라오는 ‘미친듯한 책임감'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처음 경험한 자유는 마치 무한정 초콜릿을 꺼내 먹을 수 있는 마법의 상자를 손에 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자유에는 그에 합당한 책임이 따른다'는 진리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왕이면 평소에 비싸서 못 먹는 초콜릿으로 :)



1. ‘진짜' 철저한 성과주의


실리콘밸리 회사들은 일하는 시간, 장소, 방식 모두 자유롭게 해 주고, 돈도 많이 쥐어주는 대신 딱 하나만 묻습니다.

"너, 니 몸값하고 있니?"


이를 체크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에서는 성과에 대한 평가를 아주 구체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진행합니다.



(1) 주기적인 피드백 (Ongoing Feedback)


'피드백'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여기에서는 공식적인 평가 시즌 외에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과 협업 문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하며 개선할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매니저와는 내가 설정한 성장 목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와의 격차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를 깊이 있게 논의하죠.



(2) 자가 평가 (Self Review)


1년에 두 번 공식적인 평가를 할 때 자가 평가를 작성해요. 주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작성합니다.  

-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는 무엇인가요? 구체적인 예와 데이터를 함께 적어주세요.
- 다음 평가 전까지 발전을 위해 집중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직급에 맞는 기대되는 성과를 고려해 주세요.


처음 자가 평가를 작성할 때, 빈 구글닥을 띄워놓고 한참을 난감해했던 기억이 나요.


“내가 돈을 받았으니 일을 한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걸 어떻게 자랑을 하지?”

“내가 개선해야 할 점을 말하는 건 내가 그걸 지금 못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아닐까?”


한국에서 익숙했던 일방적인 탑다운 평가와는 너무 달라서, 잘한 걸 내세우는 것도, 못한 걸 인정하는 것도 모두 어색하기 짝이 없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일’에서 ‘내 감정’을 빼고 보는 법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어요. ‘자랑하는 게 민망하다', 혹은 ‘개선해야 할 점을 인정하는 게 부끄럽다'에서 민망하거나 부끄럽다는 감정을 걷어내니, 훨씬 객관적으로 내 일 자체를 바라보고 내가 잘한 것과 개선할 점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됐습니다.



(3) 360도 동료 피드백 (360-degree Peer Feedback)


또 하나 자주 볼 수 있는 절차가 360도 동료 피드백이에요. 직급, 연차, 직무 상관없이 내가 함께 일한 디자이너, 프로덕트 매니저, 엔지니어, 유저 리서처 등 다양한 동료들이 나를 평가합니다. 주요 질문은 자가 평가와 비슷해요. 

- 00의 주요 강점은 무엇인가요?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최소 2가지를 적어주세요.


이 동료 평가는 자가 평가와 함께 진행되지만, 필요에 따라 비공식적으로도 진행되기도 해요. 승진을 원하는 사람이 있거나 성과가 저조한 사람이 있는 경우, 더 깊이 있는 피드백을 받기도 하죠. 이때는 협업 능력, 커뮤니케이션 스킬, 문제 해결 능력 등이 여러 사람의 관점에서 평가됩니다.



결론적으로, 여기서는 거의 1년 내내 내가 몸값을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를 받는 느낌이에요. 




2. ‘진짜' 쉬운 해고


이렇듯 수시로 다양한 방법으로 성과를 측정한 결과, 회사가 직원의 ‘몸값'에 의문을 갖게 된다면? 여기서 ‘해고’라는 말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입사 초기, 제가 함께 일했던 프로덕트 매니저 A는 그다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프로덕트 매니저라면 자고로 커뮤니케이션과 오너십이 생명인데, 당시 경력이 짧았던 저조차도 그가 어떤 것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죠. 마치 대학 팀 프로젝트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묻어가려는 뻔뻔한 팀원처럼, 이메일과 메신저, 각종 코멘트 등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었어요. 어느 날, 그에게 전날 보낸 메시지에 대해 답을 받으려 메신저를 확인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그의 계정에 삭제 알림이 떴습니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조용히 해고된 것이었죠.


알고 보니 실리콘밸리에서는 당일 해고가 흔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이메일을 통해 해고 통보를 받고는 바로 회사 시스템에서 계정이 삭제되고, 모든 업무 접속이 차단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더군요. 그걸 처음 실제로 목격했을 때는 꽤 충격이 컸습니다. 저도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더군다나 당시 저는 비자 문제로 인해 해고되고 나서 짧은 시간 내에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당장 짐을 싸고 미국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잘릴 수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은 항상 저를 짓누르고 있었죠.


Mission District, San Francisco


시간이 지나면서, 해고가 꼭 개인의 성과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성과와 상관없이 회사의 사정이나 사업 방향에 따라 팀 전체가 직급에 관계없이 잘리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최근 몇 년간 많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주가 하락이나 비용 절감을 이유로 구조 조정을 하면서 대규모 해고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저희 회사에서도 재직 중에 세 차례의 레이오프를 경험했는데, 매번 전체 인원의 약 10% 내외가 해고 대상이 되었어요. 바로 전날까지 함께 프로젝트를 논의하던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사내 시스템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슬프고 착잡한 마음이 들었죠.


이처럼 개인의 성과 때문이든, 회사의 사정 때문이든 해고는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닥칠 수 있기에, 실리콘밸리의 직원들은 찐사랑을 찾기보다는 노련한 ‘프로 썸남/썸녀’처럼 행동하는 것 같아요. 


한 회사에만 올인하고 독점적인 관계를 꿈꾸다 보면, 기대가 커지고 그만큼 실망도 커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가 만약 해고라는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면, “난 너만 바라봤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는 절망감에 빠지기 쉽죠. 하지만 썸을 타는 관계에서는 함께하는 동안 최선을 다하되, 언제든 이쪽저쪽 힐끗거리며 기회를 엿볼 여유가 있어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 의존하지 않는 이 관계 속에서, 각자 스스로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거죠.


거리두기



3. ‘진짜' 주도적인 마인드셋


자주성(Autonomy)은 개인이 외부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고, 주도성(Proactivity)은 능동적으로 문제를 예방하거나 해결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직급별로 해야 할 업무가 정해져 있고, 주로 상사가 지시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흔해서 이 두 덕목이 크게 요구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히려 '복종성'이나 '순응성'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죠.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자주성’과 ‘주도성’이 필수입니다. 누군가 알아봐 주겠지, 누군가 해결해 주겠지 하고 앉아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자리도 지킬 수 없는 것 같아요.



(1) 내 밥그릇은 내가 챙기자


여기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직접 손을 들어 요청해야 합니다. 사실 이걸 깨달은 건 실리콘밸리에서 일을 시작한 지 좀 지난 후였어요. 


당시 주니어 디자이너로서, 매니저의 도움 없이도 프로젝트를 이끌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애를 쓰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첫 공식 업무 평가가 찾아왔습니다. 매니저가 제 ‘성과’를 언급할 때는 한껏 뿌듯했는데, ‘개선점’으로 지적받은 건 조금 놀라웠어요. 바로 ‘자기 인식(Self Awareness)을 높이라'는 것이었죠. 사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꽤 자부심이 있었어요. 20대 내내 세계여행 및 인생을 바꾼 선택들을 통해 누구보다 나를 부단히 탐구해 왔다고 믿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매니저의 말을 더 듣다 보니, 다른 직원들은 1:1 면담 시간에 이 프로젝트는 별로다, 저 팀 일이 궁금하다며 자신의 생각과 관심사를 자주 이야기하는 반면, 저는 별다른 말 없이 맡은 일만 잘 해내는 데 집중하고 있던 거예요. 눈앞의 일에만 몰두하느라 그 일이 나에게 얼마나 잘 맞는지, 다른 일들은 어떤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업무 외적으로는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지 몰라도, 일적으로는 정말로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죠. 그때부터는 프로젝트 진행 중 제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프로젝트와 팀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탐색해 나갔죠. 


그러던 중 백엔드 엔지니어로만 구성된 '서치' 팀에서 한 번의 검색으로 여러 콘텐츠를 찾아주는 '유니버설 서치' 기능을 추가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흥미롭게 생각해 매니저와 상의 후 자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여러모로 개고생감이었지만, 주니어 디자이너로서 체계가 덜 갖춰진 팀에서 디자인을 리드했던 경험은 저를 빠르게 성장시켜 주었어요. 그때 배운 것들은 지금까지도 제 근육처럼 단단히 남아 있답니다.


또한, 여기에서는 승진도 가만히 기다린다고 알아서 시켜주지 않더라고요. 주도적으로 일을 해나가다 보니 ‘나, 이 정도면 승진해야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셀프 승진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은 디자이너 레벨마다 기대되는 직무 역량이 적힌 문서가 있는데, 그 문서를 바탕으로 제가 다음 레벨에서 요구하는 역량을 얼마나 잘 충족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매니저 평가와 동료 평가를 거쳐 승진을 할 수 있었죠.


The Painted Ladies, San Francisco



(2) 내 똥도 내가 치우자


실리콘밸리의 수평적인 조직 문화와 위아래가 없는 평가 방식은, 문제가 발생하거나 일이 꼬였을 때 그 ‘책임’ 역시 공평하다는 의미였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다른 팀과 얽힌 난감한 상황이 생겼어요. 저는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매니저의 의견을 물어봤는데, 그 해결책이 결과적으로 오히려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게 되었죠. 이 사태를 여러 사람과 1:1 면담을 통해 어렵게 수습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곳은 "팀장님이 하라셔서요..." 한 마디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한국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생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매니저가 시켜서 했는데..." 같은 변명은 전혀 통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말을 뱉는 순간부터 나는 주도성 없고, 남 탓이나 하는 데다가, 프로젝트를 스스로 이끌어갈 능력도 없는 쩌리로 찍히는 거죠. 내가 한 행동이 매니저의 지시를 따르든, CEO의 말을 듣든, 지나가는 개가 알려줬든 간에,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건 100% 내 책임이에요. 그래서 매니저의 조언이 나랑 맞지 않거나 잘못됐다고 생각되면, 그 자리에서 내 의견을 반드시 말해야 해요.  


결국 누구의 말을 듣고 했든 간에 내 똥은 내 똥이고, 그걸 치우는 것도 오롯이 내 몫인 겁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CEO는 여기서도 예외인 것 같긴 해요^^)


내 똥은 내가 치우자





미친듯한 자율성과 그에 따른 무거운 책임.
제한된 자유와 그 대신 조금 가벼운 책임.

역시 어디든 완벽한 파라다이스는 없는 것 같네요.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실 것 같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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