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편은 자동차 기계설계사이다. ‘그런 직업이구나’까지만 알고 결혼했던 나는 남편에 대해, 특히 그 직업의 특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결혼을 했다. 아니 알아야 하는 필요성도 사실 몰랐다. 그저 한 직장을 오래 다니며 성실하고 조용한데 자신의 생각이 뚜렷했던 남편은 나에게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다.
결혼한 후에 남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출장을 갔다. 한 번가면 몇 개월은 기본,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내 일 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국내 출장은 한 번에 2-3주씩 주말에 겨우 와서 빨래 주고 다시 가는 정도로 다니고 해외 출장은 수개월씩 1년의 70프로를 출장으로 보내던 남편, 그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남편이 그려놓은 도면이 커다란 기계가 되고 그 기계가 자기 역할을 할 때까지 이상이 없는지 체크하며 잘 활용되도록 돕는 일까지가 자신의 역할이라는 이야기를 한참 후에나 들었다.
조금씩 그의 직업을, 그의 출장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수년이 지나고 나니 그의 출장이 오히려 나의 삶에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남편이 출장을 가면 아이와 저녁도 시켜서 먹고 늦게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고요한 시간을 보내다 잠드는 일이 달콤해지기 시작했다.
도면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일은 창작활동이었다. 데스크 앞에 오랜 시간 앉아 있어도 뚝딱 하고 완성되어 나올 일 없지만 마감 기한이 다가오면 되는 날까지 데스크 앞을 지키며 견뎌내느라 남편의 퇴근 시간은 늘 10시 11시였다. 그래서 남편의 회사 옆으로 이사하고, 저녁도 같이 먹을 일이 없으니 아침은 차려주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생선 굽고 찌개 끓여 아침을 차린 지 10년, 우리는 루틴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코로나로 남편의 해외출장이 멈추고 국내 출장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버텨내는 시간을 보내며 경기가 힘들어지니 신차 출시 소식도 줄어들고 기업 간의 경쟁도 더 극심해져서 조금씩 남편의 바쁨까지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9시 8시 7시 6시 남편의 퇴근시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월화수목금토일 같이 있는 일상으로 가득해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지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 출장을 가지 않는 남편 아침 점심 저녁까지 하루 세끼 챙기고 차려야 하는 일은 나에게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다.
“왜 이렇게 출장을 많이 다니는 직업을 가졌어?” 하며 아이 키우며 힘들 때마다 많이 울기도 하고 투정도 부렸었다. 제발 저녁에 퇴근해서, 아니 주말에라도 집에서 아이와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모른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참 무섭다. 그렇게 남편, 아빠 없는 삶이 익숙해진 우리에게 남편의 존재는 조금씩 부담으로 다가왔다. 챙겨주고 신경 써줘야 하는, 갑자기 찾아온 큰아들 같은 존재.
결혼하고 12년, 남편의 아내로 아이의 엄마로 열심히 살았다. 공부하러 다닐 때도, 학위 딴다고 스터디할 때도, 새벽 독서모임에 다닐 때도 불편한 강의실 의자를 붙이고 내 무릎에서 잠든 아이를 보며 많이도 울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공부하고 성장한다고 애써야 할까, 난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아이에게 너무 욕심 많은 엄마 같아서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남편에 대한 서운함과 억울함과 더해져서 마르지 않는 눈물로 나타났던 것 같다.
코로나 2년! 아이가 어느새 열두 살이 되었고, 이제 조금씩 셋이서 같이 하는 저녁시간이 익숙해진 우리는 서로의 시간과 공간, 동선, 취미를 존중해가면서 한 공간에서 슬기롭게 머물고 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혼하고 10년, 출장 다니고 일에 열중하던 당신을 내조하며 열심히 살아온 나를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 없이 한 번도 생각이나 여유를 갖지 못했던 나에게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제 내가 출장을 간다.
출장 간 순간만큼은 밥해야 하는 것도 잊고, 사람들을 만나서 편하게 대화하며 인사이트도 얻고, 나의 현주소를 체크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싶다. 새로운 경험과 도전으로 아내와 엄마가 아닌 나로 잠깐 살아보고 싶다. 출근하고 출장가면 집안일은 다 잊고 일에 열중하던 당신처럼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아니 두 달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출장 좀 가겠다고 말이다.
출장 계획을 이야기하고 호텔을 예약했다. 가방 다 싸 두면 자신만 챙겨 출장 가던 남편이지만 난 상황이 다르다. 출장 가기 직전까지 미리 해두고 신경 써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다. 그런데 자꾸 남편이 묻는다.
“나는 출장 가는 게 너무 싫었는데 당신은 기다리는 것 같네. 출장 간다고 너무 설레는 것 같은데 그냥 여행이라고 하지!”
“ 나 여행 아니고 출장이라니까. 일 이야기,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 때문에 가는 거잖아. 난 좋아하는 일 해서 출장도 기다려지는 거거든!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지 말고 출장비 좀 지원해줘!”
“아니 출장을 가면 돈을 벌어와야지. 왜 쓰고 와!”
“다 투자하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나한테 투자 좀 해.”
처음은 힘들었는데 두 번째는 쉬웠다. 아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했다. 남편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앞으로 10년 아내를 위해 내조해줄 남편에게 꼭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그래서 전 지금 웃으며 출장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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