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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ttee Jan 31. 2019

힘 빼고 일하기

IT 회사 적응기

사회생활을 '을'로, 그것도 작은 조직에서 시작해 본 사람은 큰 조직에서 시작한 사람과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몇 주간 연수를 받고, 회사 시스템에 대해 배우고, 퇴근 후 동기들과 술 한잔 하며 첫 사회생활의 즐거움과 어려움에 대해 얘기하고... 이런 시간을 만끽할 여유가 없다.


우리 팀의 업무와 내가 당장 뭘 해야 하는지 간단한 브리핑을 받고는 바로 일에 투입된다. 처음에는 끝도 없는 리서치와 자료 만들기지만 내가 조사하고 만든 자료가 곧바로 클라이언트와의 미팅 자료로 쓰이고, 클라이언트는 이를 토대로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갈아 넣는다'. 조금 경험이 쌓이면 미팅을 따라다니며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는 경험치를 쌓고, 그다음에는 직접 프로젝트를 이끌게 된다. 나의 경우 마지막 단계까지 오는데 딱 3년이 걸렸다.


내가 몸담았던 작은 조직은 회사들을 대상으로 투자/M&A 자문을 하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는 클라이언트들의 대부분은 CFO, 대표이사 또는 창업자들이었다. 가방끈이 긴 사람, 짧은 사람, 월급쟁이 사장, 바닥부터 사업을 일군 창업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하는 일에 도가 튼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누구보다 그 산업을 빠삭하게 알고 있고, 회사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자문사'로서 돈을 받으며 '자문'을 하는 일은 정말 부담스러운 일이다. 고작 며칠, 길어 봤자 몇 주을 파서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이해도를 갖고, 그걸 넘어서는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일. 물론 특수한 영역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치와 스킬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업력, 나이, 아우라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버거운 일이었다.


여자지만, 어리지만, 그 산업에서 안 굴러봤지만, 대등하게 (적어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논의할 수 있는 상대가 되기 위해서 나름의 노력을 하며 이런저런 스킬들도 쌓아갔다.




그리고 3년이 지나가던 어느 날, 한 IT 회사가 우리 클라이언트로 들어왔다. 그 회사는 처음부터 좀 이상했다. 누가 직원인지 임원인지 모르게 격의 없이 토론하고, 오너가가 아닌데도 다들 자기 회사인 거처럼 열정적으로 일하고. 자문사인 우리와도 속을 다 까놓고 진짜 '일'이 되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 이 재밌는 사람들과 몇 개월을 같이 일하게 되었고, 그 후 나는 이 회사의 자문사가 아닌 직원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첫 큰 조직 적응은 순탄치 않았다. 이전 회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편한 일이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좋은 사람들인데... 묘하게 불편하고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힘들었다. 일은 하고 있지만 뭔가 맞아떨어지지 않았고, 사람들과도 이상하게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직속 팀장이던 여자 상사가 나를 불렀다.


'우리 오늘 끝나고 맥주 한잔 어때요?'


작은 이자카야에서 둘이 마주 앉았고, 여자 상사는 내게 일하는 건 어떤지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다. 그리고 얘기했다.


'J는 조금 힘을 빼도 될 것 같아요'


머리를 쿵 하고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


'J는 우리 팀의 일원이지 자문사가 아니에요. 우리는 J가 우리에게 자문을 해주고, 결정 내어주길 바라지 않아요. 다 같이 의견을 나누고 논의를 하는 거지만 거기서 꼭 J가 무슨 역할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리는 한 팀이에요.'


따뜻하면서도 뼈가 있는 팀장님 얘기에 한동안 멍했던 것 같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팀원들에게 '자문'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몇 년 동안 IT 업계에서 그 일만 해오던 사람들에게, 심지어 내가 해온 투자 일도 아니었는데... 서로를 배려해주는 팀의 분위기상 내 얘기를 들어주고 고개도 끄덕여도 주었지만, 그 사람들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잘 모르는, 그것도 attitude가 겸손하지도 않은 어린 여자애의 그런 모습이 좋아 보였을 리가 없다.


이 일은 내가 이 회사에서 일하는 방식을, 그리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해 준 큰 계기가 되었다.




다들 그런 경험 있을 것 같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껏 긴장하고, 이거저거 잔뜩 준비해서 들어간 미팅에서 버벅거리고 매끄럽게 진행 못하고, 끝나고 나와 머리를 싸매고 자괴감에 빠져 본 경험. 반면 별 준비 없이 편한 마음으로 '일단 얘기해 보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지 뭐~'라는 마음으로 들어간 미팅에선 술술 얘기가 풀리고 분위기도 좋고, 의외의 아웃풋을 얻어온 경험.


내가 힘을 주고 있으면, 나의 긴장감이 상대까지 불편하게 하고, 지나치게 많은 생각 때문에 '이 말을 해도 되나 말아야 하나'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등 본질이 아닌 것에 신경이 분산된다. 반면 내가 편하게 하면 상대방도 더 마음을 열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여 진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


배운 버릇이 있다고 아직도 완전하게 힘을 빼고 있지는 못하다. 타고난 천성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편안하게, 본질에 집중하고, 내려놓게 되었다. 그랬더니 더 많은 기회가 열렸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졌고 무엇보다 내가 너무 편하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동네 워킹맘 엄마들과 모임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는 나와 다른 온도를 가진 더더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협업을 하며 가끔 힘을 주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J, 힘을 빼도 돼. 우린 한 팀이야'  



P.S. 그 팀에서 나는 인생의 친구들을 만났고, 여자 팀장과는 2년 뒤 어느 바에서 그 날을 회상했다고 한다. (나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ㅠ)

보고싶어요 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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