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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식탁에 앉아 오전에 마시다 만 밍밍해진 아이스라떼를 쪽 빨아 마신다. 베란다 창 밖으로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 거리고 간간히 들리는 새소리.
청소도 다 했고, 아이 저녁 국과 남편 반찬도 완료. 회사 팀 카톡방에는 업무 톡이 쉴새 없이 올라오지만 내가 대응해야할 필요는 없다. 아이를 픽업하러 가기까지는 아직 한시간이 남아있다.
'할 게 없네'
할 게 없다니. 불과 이주전만해도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일상을 따라가느라 신경은 계속 곤두서 있고,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살고 있었다. 아이 등원길에도 내비게이션의 도착 예정시간을 끊임 없이 째려보며 1분이라도 단축하기 위해 브레이크와 엑셀을 번갈아 가며 달렸다. 누가 내 앞에 끼어들어 신호를 아슬아슬하게 놓칠때면 '아이씨, 저 새X가...' 나도 모르게 욕설이 입에서 튀어 나왔다가는, 뒤에 아이가 앉아 있는걸 깨닫고 바로 후회했다.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아이를 들쳐안고 후다닥 반으로 올라가 아이를 내려 놓고 정신없이 인사 하고 나오기 일쑤. 남편이 오늘은 아이를 몇시에 픽업하러 갈지 회사에서도 계속 걱정, 퇴근하고 집에 가면 난장판이 된 집안에 한숨이 절로 나오고, 아무리 칼퇴하고 저녁을 준비해도 8시는 되어야 다 같이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그랬던 일상이 벌써 아득하게 느겨진다.
살림이 이런 것이구나를 요새 배우는 중이다. 아이가 없을 때는 반찬 하나 만드는 것이 그렇게 큰 일이였고, 화장실 청소는 도우미 아주머님이 오셔야만 할 수 있는 것, 손으로 걸레를 빠는 것은 우리 엄마 때나 하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 음식을 직접 만들다 보니 이제 아기 반찬, 국은 서툴게나마 후딱 만들어 낼 수 있고, 화장실 청소도 생각날 때마다, 아이가 앉아 노는 곳은 매일 물걸레로 훔치고 있다. 내 손이 닿아 구석구석 깨끗해지고 정돈되어 가는 집을 보면서 '아 내가 살림을 하고 있구나' 싶다. 왜 애가 없던 때는 이렇게 할 생각을 못했을까. 그 때 내가 좀 더 살림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아이가 태어나서도 능숙하게 육아와 가사를 했을 것이고 이렇게 중간에 휴직을 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분명 그 때에 최선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했었을 것이다. 청소기 한번 돌릴 시간에 회사 일과 관련된 글을 찾아 읽고, 저녁을 차리는 대신 외식하며 남편과 서로의 하루가 어땠는지를 이야기 하고, 틈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내 시간을 보냈다. 그 때의 나에게 살림이란 언제나 나와 일, 그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할 수도 있는 것이였다. 그리고 그 여유는 여간해서는 오지 않는 것이였다. 항상 해야 할 다른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결혼하고는 그다지 변하는게 없지만, 아이를 낳고 나면 인생이 변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절감하고 있다. 그냥 같이 사는 사람이 한 명이 생겼을 뿐인데, 이 사람은 나의 에너지를 점점 안으로 안으로 빨아 들이고 있다. 구글의 새로운 기술 발표 영상보다, 스타트업의 대규모 투자 유치 소식보다 '18개월 아이 떼쓰기', '아이와 함께 가기 좋은 곳' 라는 키워드에 더 관심이 간다. 사람들과 경쟁사 회사의 전략에 대해 토론 하는 것보다, 다른 엄마와 그 집 아이는 요새 뭘 가지고 노는지, 어떤 간식을 해 먹이는지 수다를 떨고 싶다.
휴직을 해서 관심사가 바뀌는 건지, 관심사가 바뀌어가서 휴직을 결심한 건지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히 알겠는 것은 나에게 지금이 '그 때'인 것. 그리고 때가 왔으니 이 시간도 충실히 채워나야 하는 것.
사실 찾아보면 할 게 많다. 신발장도 싹 한번 꺼내 버릴 건 버리고 정리하고 싶고, 체력을 키우기 위해 운동도 한가지 시작하고 싶고, 아이 심리에 대한 책들도 읽어 보고 싶다. 6개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시간, 안으로 향하는 에너지들이 나와 아이, 그리고 우리 가정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기대된다. 일단 세시가 되었으니 아이를 데릴러 가야지. 내비게이션은 꺼놓고, 아이가 혼자 계단을 내려 올 수 있도록 손을 잡아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