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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ttee Sep 05. 2019

육아 사춘기

그렇다. 나는 요 며칠간 육아 사춘기를 겪고 있다.


시작은 아이의 늦여름 감기였다. 감기 한번 없이 여름을 잘 나고 있다 라고 안도하고 있던 어느 날, 남편이 서늘한 새벽녘에 에어컨을 켠 것이다. 좀 춥다 싶어 잠결에 아이의 맨다리에 손을 뻗어보니 차가워진 아이의 피부. 싸한 기분으로 황급히 에어컨을 끄고 이불을 덮어 줬지만 그 날 오전부터 아이는 콧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 주에는 내가 계획한 일들이 있었다. 아이 어린이집 근처에 근사한 사진관 겸 카페를 알아놓고 탐방까지 다녀온 차였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는 그 카페에서 마늘 바게트와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여행 계획을 세워야지. 마음속으로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콧물 흘리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이 정도면 괜찮아. 어린이집에서 뛰어놀면 땀도 나고 더 빨리 나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며 노트북에 이어폰, 혹시 글을 쓰고 싶을지 몰라 일기장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 어린이집에 도착하니 선생님이 걱정스럽고 미안한 얼굴로 '어머니, 준이네 반 친구가 구내염 확진 판정을 받았어요.'라고 하신다. 하아... 곧 여행을 가야 하는데 어떡한다. 머릿속으로 30초쯤 고민을 한 후, 점심 먹자마자 하원 하기로 한다. 나에게 남은 건 2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설상가상 내가 찜해놨던 그 카페는 11시부터 오픈이란다. 결국 어린이집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그저 그런 커피와 냉동 베이글을 먹으며 후다닥 계획을 세우고는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의 콧물은 가래 기침으로 이어지고, 한 명이던 구내염 확진 친구가 수족구 한 명 추가, 구내염 한 명 추가 그리고 또 한 명... 일주일 동안 줄줄이 늘어갔다. 그리고 이 주째 준이는 나와 함께 집에 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진 거실. 그저 누워서 쉬고만 싶어 누운 채로 세이펜으로 책을 찍어 주기도 하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엄마 없다'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유모차를 끌고 밖으로 나간다. 한참 놀이터와 산책길을 지나다니며 놀다 아이가 배가 고파졌겠다~ 싶으면 아이와 먹을 수 있는 식당에 들어간다. 동영상을 보여주며 아이에게 밥을 두둑이 먹이고, 남은 반찬과 밥으로 내가 배를 채운다. 배가 부른 아이는 순순히 유모차에 올라타고 곧 잠이 든다. 지금이다! 유모차를 전속력으로 밀고 집으로 들어온다. 아기가 깰 까 온 집안을 어둡게 한 후 조심히 침대로 옮겨 눕힌다. 후다닥 집안을 정리하고 할 일을 좀 하는데 야속한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오후 육아가 시작된다. 기차놀이, 레고, 책 보기, 그림 그리기, 비눗방울... 매번 하는 것을 한바탕 되풀이하고 나면 드디어 아빠가 올 시간. 저녁을 차려 먹고 목욕 또 한바탕 놀기 등 루틴을 치르고 나면 드디어 다시 밤이다.


 



겉으로 보면 수없이 반복했던 그런 육아 일상이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준이와 나는 시간이 많으니 둘이 맛있는 것도 먹고 놀러 다니며 재밌게 놀면 돼. 이렇게 좋을 수가!'라고 생각했던 이전과는 달리 '오늘은 또 무얼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하나...'라는 생각이 한가득이다. 오늘은 차를 타고 다른 곳을 가봐야지.'라고 마음먹었다가도 '에이 귀찮은데 그냥 동네 산책하고 말지.’ 라고 이내 마음을 접는다. 아이와 놀면서도 내 머릿속은 계속 다른 곳을 헤맨다.


내가 아이를 안 낳았다면 지금 내 삶은 어땠을까?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어땠을까?

일찍 결혼했던 그 친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이를 안 낳고 있는 그 친구 부부의 생활은 어떨까?


아마 아이가 감기에 걸릴 무렵부터 읽기 시작한 하루키의 '먼 북소리'의 영향인 것 같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보니 먼 곳에서 가냘픈 북소리가 둥둥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아내와 둘이 3년간의 긴 유럽 여행을 떠난다. ‘떠나야 겠다고 생각해서 떠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나에게는 꿈만 같은 이야기. 로마, 아테네, 그리스, 핀란드 상황에 따라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한 마을에 정착해서 집을 구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집에서 글을 쓰고, 동네를 산책하고. 이 아저씨의 소박한 일상이 나에게는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아마 이 생애에서 내가 저렇게 살아 보는 일은 없겠지?


나는 3박 4일의 짧은 여행을 위해 이 주동안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21개월 예민 보스 남자아이를 고려하여 일정은 하루에 1-2개만. 무조건 밥과 국이 나오는 (이왕이면 간장 양념 고기도 있는) 식당으로. 동선은 아이가 차에서 낮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며, 바닷가는 고운 모래사장이어야 함. 일정을 요리조리 바꾸고, 더 괜찮은 식당이 없을까 카페와 블로그를 드나들며, 혹시 내가 생각하지 못한 준비물은 없을까 아이와 함께한 여행 후기들을 읽어 본다. 그러다가도 잠자리에 누우면 '차 창문에 선텐이 잘 안되어 있음 눈이 부실 텐데, 차에 커튼을 떼어가야 하나?, 커피 포트를 써야 하는데 더러우면 어쩌지. 구연산을 챙겨가야겠다. 호텔방에 전자레인지를 놔달라고 할 수 있을까' 라며 끊임없이 체크해야 할 것들이 떠오른다. 이쯤 되면 힐링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회사 프로젝트 수행이다.




문득문득 결혼 전의 내 삶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화창한 주말 오전 자전거에 핸드폰 하나만 꽂아 한강변을 따라 팔당댐까지 올라갔다 올 수 있었던 시절. 친구 결혼식 들러리를 서기 위해 훌쩍 미국으로 날아가 새벽 1시까지 춤추고 술 마시며 웃고 떠들었던 기억. 언니와 둘이 사우나에서 미숫가루 한 병을 주문해 쪽쪽 빨아 마시며 서로의 등을 밀어주던 추억. 거기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자유로운 여행을 하는 아저씨 글을 읽다 보니,

'여름이 다 지나간 마당에 왜 이 어린이 집은 구내염이 다시 유행하는가. 남편은 왜 이런 날씨에 에어컨을 켰는가. 아들은 한약에, 고기반찬에 엄청 챙겨 먹이는데도 왜 몸무게가 늘지 않는가. 이런 마당에 둘째는 언제 낳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나는 뭔가'라는 생각에 속으로 분노, 화, 슬픔, 미안함 등이 뒤섞였었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을 시작하는 장마가 시작됐다. 이 비와 함께 나의 육아 사춘기도 지나갈 것 같다. 그리고 사춘기가 그러하듯 나도 한 뼘 더 성장해 있겠지. 그러니 기다리자. This shall too p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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