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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우 Dec 22. 2016

북유럽 연어요리 '그라브락스'의 변신은 무죄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음식방랑기



사랑의 첫 번째 조건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음식을 사랑하는 일명 '애식가(愛食家)'도 마찬가지다. 식재료와 조리방법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 음식과 배경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어떤 요리든 사랑할 수 있고 그래야만 진정 음식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세계 최악의 악취를 자랑한다는 수르스트뢰밍이면 어떻고 홍어면 어쩌랴. 중요한 건 입맛에 맞냐 맞지 않느냐가 아니라 경험의 지평을 조금 더 넓혔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지 않을까. 어떤 음식을 먹어보지 않고 싫어한다는 건, 사람을 겪어보지도 않고 그냥 싫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니 말이다.



여기 비운의 음식이 하나 있다. 바로 북유럽을 대표하는 식재료, 연어로 만든 '그라브락스(Gravlax:스웨덴)'다. 노르웨이에선 gravlaks, 덴마크에서는 gravad lax라고 부르는 이 요리는 생연어를 설탕과 소금, 허브인 딜(Dill)에 버무려 약 3일간 재운 후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 먹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훈제연어완 달리 훈연 향이 없어 먹기에 큰 부담이 없고, 생연어와 비교했을 땐 비릿한 맛 없이 진한 감칠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만드는 과정이 비교적 간편해 가정에서도 쉽게 만들 수 있어 특별한 날 손님을 대접하기에도 좋다. 


그런데 비운의 음식이라니. 사실 원래의 그라브락스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땅속(Grav)에 묻은 연어(lax)를 뜻하는 그라브락스는 전통적으로 연어를 해안가에 묻어 발효시킨 음식이었다. 발효시킨 생선이라. 벌써 코를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앞선 글에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음식을 장기 보관하기 위해선 세 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절임과 훈제, 그리고 발효다. 냉장고가 흔한 오늘날엔 훈제나 발효가 풍미를 위해 일부러 수고를 들여 음식을 가공하는 방식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 생존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방법이었다. 소금에 절이는 방법이 훈연보다 원재료의 맛과 향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 보존력도 좋아 선호되는 방법이었지만 과거에 소금은 지금처럼 풍부한 재료가 아니었다. 가난한 스칸디나비아 연안의 어부들이 연어를 값비싼 소금에 절이는 대신 자작나무 껍질에 연어를 싼 후 냉장고 대용으로 차갑고 습한 땅 속에 보관한 데서 그라브락스가 탄생했다. 


오늘날의 그라브락스는 전통방식처럼 땅속에 묻지 않는다. 대신 설탕과 소금에 묻는 '드라이-큐어링(Dry-Curing)'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일각에선 '마리네이드(marinade)'라고 표현되기도 하는데 마리네이드는 수분에 재료를 담그는 'Wet-Curing'에 해당한다) 여기에 첨가되는 미나리과의 허브 딜은 향과 맛을 더할 뿐만 아니라 박테리아 생성을 억제해주는 역할도 한다. 



딜은 북유럽 요리에서 빼놓으면 섭섭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쓰이는 허브다. 이탈리아에 파슬리가 있다면 북유럽은 단연 딜이다. 오늘날 그라브락스 하면 딜로 뒤덮인 향긋한 연어를 떠올리지, 아무도 땅속에 묻어 퀴퀴한 향을 내뿜는 반쯤 발효된 연어라고 생각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원래 묵어야 제맛인 김치가 겉절이에 불과한 기무치로 뒤바뀌어 전 세계의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할까. 원래의 그라브락스가 보면 무척 서운해할 일이고, 땅속에 묻어 발효시킨 맛이 좀처럼 궁금한 나로선 실로 원통하고 애석할 뿐이다. 


그렇다면 자긍심 강한 바이킹의 후예, 노르웨이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어시장과 생선가게들을 다니며 '정통 그라브락스'에 관해 묻고 다녔다. 대부분 그런 걸 왜 궁금해하는지 신기하게 여겼고, 심지어 정통 그라브락스에 대해 처음 알았다는 노르웨이 사람도 만나볼 수 있었다. 답을 얻지 못했단 생각에 허탈해하고 있던 중에 중후해 보이는 생선가게 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이야기한다.


"맛이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맞는 말이다. 땅 속에 묻어 발효시킨 그라브락스는 설탕과 소금, 딜에 묻어 절인 그라브락스와의 대결에서 패했다. 강하고 자극적인 맛보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맛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그라브락스도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옷을 갈아입은 그라브락스는 그 심플한 제조법과 맛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북유럽 스타일 음식으로 공고히 자리 잡았다. 같은 생선 발효 음식인 락피스크(Rakfisk)와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Surströmming), 아이슬란드의 하칼(Hákarl)은 국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소수의 사람들에게 별미로 간신히 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어쩌면 원래의 그라브락스가 더 우월하고 맛이 있었을 것이란 기대는 나의 편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하면서 새롭고 이국적인 맛을 쫓다 보니 정작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이란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위한 것이라는 걸 말이다. 


정통이니 오리지널이니 하는 건 사실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500년 전 방식 그대로 요리를 한다고 한들 당시의 그 맛을 완벽히 재현해냈다고 할 수 있을까. 우선 확인해 줄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 방식이 지금의 입맛에 꼭 맞으리란 법도 없다. 요리도 정치나 사람처럼 변화하는 생물이다. 제대로 만들어 내겠다는 마음가짐과 사람들의 입맛을 존중하는 태도로 요리를 한다면 아무렴 어떤가. 결국 요리는 먹는 사람을 감동시켜야 하는 게 첫 번째다. 애식가는 음식을 편견 없이 사랑해야 하고, 요리사는 자신의 요리를 먹어주는 고객을 편견 없이 사랑해야 한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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