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음식방랑기
여행과 일상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는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불확실성'의 빈도다. 일상을 벗어나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확률이 높아진다. 낯선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기대. 이것이 여행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느닷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아 옷깃이 젖는 것처럼, 뜻밖의 감동은 마음을 따스하게 적시며 오랜 여운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그날은 2016년의 마지막 날, 스페인의 고도(古都) 톨레도를 가로질러 흐르는 타호강의 알칸타라 다리를 향해가던 중이었다. 길가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먹고 마시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냄비 두 개가 길 위에 놓여 있고 냄비 안에선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늘 그래 왔듯 호기심에 음식 앞으로 바짝 다가가 내용물을 살폈다.
초리조와 모르시야, 돼지고기가 빵가루로 보이는 것과 함께 버무려져 있었다. 음식을 파는 노점인가 싶어 옆에 있던 한 아주머니에게 얼마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돈이 필요 없다는 포즈를 취하더니 음식이 담긴 한 접시를 내밀었다. 아니 이게 웬 횡재람. 정체불명의 접시를 받아 들자 갑자기 사람들이 주위로 모여들며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어디서 왔냐, 음식이 어떠냐, 한국에서 먹힐 것 같으냐 등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이들 틈에 섞여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집주인 마르코의 가족과 친구들로 매년 한해의 마지막 날 이렇게 모여 파티를 연다고 한다. 내게 음식 한 접시를 권했던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는 톨레도 인근의 작은 도시 에스칼로니야의 여성 시장. 무려 3선 시장님께 한 접시에 얼마면 되냐고 물어본 결례를 사과하고 이 요리의 정체를 물었다. 너도나도 한 접시 들고 먹던 이 요리의 이름은 미가스(Migas).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나름 스페인의 대표적인 요리 중 하나다. 중남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미가스는 먹다 남은 빵을 이용해 빠르고 간편하게 만들어 먹는 요리다. 굳이 비교하자면 스크램블 에그의 빵 버전이랄까.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넓은 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파프리카 가루를 넣어 볶은 후 적당량의 물을 부어준다. 거기에 초리조와 모르시야, 스페인식 베이컨을 넣고 한 소끔 끓인 후 빵 부스러기와 마늘을 껍질째 넣고 볶아주면 '미가스 만체가Migas Manchegas'가 완성된다. 지역에 따라 빵 부스러기 대신 쿠스쿠스나 밀가루를 사용하기도 하며 시금치나 양파 등 다른 재료들이 첨가되기도 한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초리조와 모르시야, 베이컨 이 3종은 스페인에서 중요한 요리 재료다. 스페인의 북쪽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는 이 3종을 '콤판고'라 하여 콩 수프를 만들 때 필수적인 재료로 쓴다. 미가스도 이 세 가지 재료가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랄까. 이 3종을 끓이든 볶든 요리에 사용하면 매콤하면서도 구수한, 거기에 약간의 산미가 더해지는 독특한 스페인식 풍미가 만들어진다.
빵 부스러기를 이용한 요리는 유럽 다른 지역, 특히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둘 다 한 때 아랍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공통점과 무관하지 않다. 고기 스튜에 빵을 적셔 먹는 아랍의 사리드Tharid에서 그 원형을 찾는데 여기서 변형된 것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12세기경 아랍의 의사 Ibn Zuhr가 빠른 소화를 돕기 위해 빵 부스러기를 기름에 볶는 조리법을 조언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방식의 요리가 당시를 전후해 아랍 지역에서 유행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아랍의 영향력 아래 등장한 미가스는 스페인 일부 지역의 요리로만 머물러 크게 빛을 보진 못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야 그 영양학적인 효과와 조리의 간편성으로 인해 스페인 민병대의 주식으로 애용되면서부터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꾸덕꾸덕한 미가스를 안주삼아 나눠먹고 나니 감자를 넣은 돼지갈비 스튜가 완성됐다. 마치 한 솥 넉넉히 끓여낸 장터국밥 같은 고기 스튜를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해진다. 여기에 커다란 페트병에 담긴 와인과 사과주 시드라를 곁들이면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 그리고 알코올의 환상적인 마리아주(marriage)가 완성된다.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의 수만큼 만족감과 행복감이 더해진다.
자신의 도시에 꼭 놀러 오라며 달콤한 디저트까지 건네준 소니아 시장과 한사코 자신의 이름이 예수(Jesus)라고 주장하던 유쾌한 아저씨, 영어로 통역을 훌륭하게 해 준 갈리시아에서 온 호세, 친절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던 알베르토 교수와 서울 삼성 썬더스 농구팀을 좋아하다는 그의 아들, 완벽한 미가스를 만들어 주고 한국에서 같이 스페인 식당을 하자던 은퇴한 미구엘 셰프까지.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 이들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혹시 이들과 미가스의 맛이 궁금하다면 2017년 마지막 날 오후 톨레도의 알칸타라 다리에 가보라. 따뜻한 환대와 맛있는 음식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방랑’ 후원하고 사진집 받으세요###
자세한 내용은 ☞https://goo.gl/lSO7X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