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음식방랑기
겨울이 되면 유독 구미가 당기는 요리가 있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단번에 녹일 만한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순대국밥이든 설렁탕이든 어떤 형태이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뜨거운 고깃국물, 그거면 충분하다.
유난히 겨울에 이런 고열량의 음식이 끌리는 건 단지 입맛이나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이 에너지를 내는 데 필요한 열량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는 인류의 DNA에 새겨진 생존본능과도 연관이 있다. 이 때문에 겨울을 겪어야만 하는 문화권에는 반드시 열량이 응축된 음식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스페인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는 '파바다Fabada'가 그런 음식이다. 우리가 '전주'하면 '비빔밥'을 반사적으로 외치듯 아스투리아스 요리하면 누구나 '파바다'를 떠올릴 정도랄까. 파바다는 이 지방 특산물인 흰 강낭콩 '파베스(Fabes)'를 이용한 콩 스튜요리다. 콩 스튜 요리는 서양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는 꽤 평범한 요리다. 여느 콩 스튜요리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파바다를 특별하게 만드 건 '콤판고 Compango'라는 세 가지 재료 때문이다. 콤파고는 파프리카를 넣은 소시지의 일종인 '초리조 Chorizo'와 돼지 피를 넣은 훈제 순대 '모르시야 Morcilla', 그리고 염장한 삼겹살'Tocino(판체타, 베이컨 등)'을 말한다. 돼지에서 비롯된 이 세 가지 재료는 특히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와 갈리시아 지방의 부엌에선 절대 빠지지 않는 재료다.
조리법은 꽤 간단하다. 물에 불린 파베스와 콤판고, 그리고 물을 냄비에 함께 넣고 두어 시간 끓이면 된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라면 끓이는 것만큼 쉽다. 심지어 콤판고와 파베스를 한 봉지에 넣어 팔기도 한다. 냄비 안의 콤파고에서 육수가 우러나오기에 다른 향신료를 첨가할 필요도 없다.
기호에 따라 야채나 향신료 등 다양한 재료들을 넣기도 하는데 일부 파바다 원리주의자(?)들은 파바다에 어떠한 향신료도 첨가되지 않아야 진정한 파바다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평양냉면에 식초와 겨자를 넣으면 냉면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파프리카 가루가 첨가된 초리조에서 매콤한 붉은 기름이, 훈제된 모르시야에서는 순대 특유의 구수한 향과 맛이, 삼겹살에서는 지방이 녹아들어 특유의 향과 맛을 가진 국물이 만들어지는데 왠지 익숙한 맛이다. 머리고기가 듬뿍 들어간 순대국밥과 다진 양념을 한 껏 푼 돼지국밥, 그리고 녹진한 내장탕의 맛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낯설지만 익숙한 겨울의 맛이다. 영혼까지 덮어버리는 듯한 진한 국물과 부드러운 파베스를 한 숟갈 떠먹으면 추위도 배고픔도 그저 먼 나라 먼 이야기일 뿐이다.
파바다 외에도 파베스에 조개를 넣어 만든 Fabes con almejas, Nécora란 이름의 게를 넣은 Fabes con andaricas도 아스투리아스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에서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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