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목소리를 지닌 여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여자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갸우뚱하는 표정을 지었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라는 것을 여자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여자가 관심을 갖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넌, 신이 목소리 빼고는 다 주신 거 같아.” 그 뒤로 목소리는 여자에게 ‘저주’가 되었다. 여자는 말 수가 점점 줄었다. 서울에서 일하던 여자는 우연히 시골 사내를 만났다. 여자와 처음 데이트 하던 날 사내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평소에 안 부리던 멋을 잔뜩 내본 듯, 젤을 바른 머리는 벼쭉정이 같았고 땡땡이 남방에 진분홍 카디건은 짝짝이 신발처럼 어수룩해 보였다. 사내가 품고 있던 낡고 닳아 손때 묻은 지갑이 어쩐지 사내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반들반들한 도시남자와는 사뭇 다른 순박한 사내에게 묘하게 마음이 끌렸다. 사내는 여자에게 첫눈에 반했고, 여자의 목소리가 좋다고 고백했다. 목소리를 긍정해 준 단 하나의 남자, 여자는 사내와 결혼했고 저주는 풀렸다. 더 이상 목소리 때문에 여자는 작아지지 않았다.
*부정성
책을 밥 먹는 것처럼 읽는 여자와,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책을 읽지 않는 사내가 10년 동안 살고 있다. 사내의 관심사는 오직 스포츠와 게임. 사내는 규칙과 관습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여자는 틀에 갇히는 것을 답답해한다. 사내는 소주를 좋아하고 원두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는다. 여자는 원두커피를 좋아하고 소주는 거의 마시지 않는다. 너무도 다른 사내와 여자는 처음 5년 동안 많이 다투었다. 신기하게도 다툼과 회복의 과정을 견디면서 둘의 신뢰는 두터워졌다. 다툼을 통해 서로가 예민해하는 부분을 잘 알게 되었고 그 부분은 서로 조심히 다루는 지혜가 생기게 되었다. 못마땅해도 쭉 변하지 않는 습관은 인정해주는 여유도 생겼다. 사내는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안정된다고 한다. 여자는 가끔 사내가 미워질 때 그가 목소리의 저주를 풀어준 은인이라는 것을 기억한다. 여자는 가끔 안전화로 고단해진 사내의 발톱을 깎아준다. 사내는 가끔 여자 모르게 원두커피를 사 온다. 둘은 가끔 함께 산책을 한다. 둘은 앞으로도 가끔 싸울 것이다.
2. '포르노'로 대변되는 '에로스의 종말'에 대한 대안
‘애로 부부’ 박혜민 “남편 조지환, 32시간마다 장소 불문 관계 요구”
얼마 전 19금 타이틀을 걸고 ‘솔직한 방송’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내놓으며 <애로 부부>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스킨십 부재, 섹스리스, 과한 성욕 등 유명인의 성생활의 고충은 방송 이후 포털 사이트에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문득 솔직한 것과 노골적인 것의 차이가 궁금해졌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솔직하다’는 것은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라는 뜻이고, ‘노골적이다’는 것은 ‘숨김없이 모두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둘 다 ‘숨김이 없다’는 면에서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노골적인 것에는 ‘바르다’의 가치판단이 없다. 생각해보면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을 드러낼 때 보통 ‘노골적이다’라는 표현을 쓴다. 화제성에 급급하여 자극만 추구할 때 <애로 부부>는 노골적인 포르노가 될 것이다. 반면 부부간의 성인식과 소통 문제에 기여한다면 솔직한 에로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포르노에는 고민이 없다. 질문하지도 않고 사유하지도 않는다. 그저 향락만 있을 뿐이다. 나는 여기서 힌트를 얻는다.
3. 정말 사랑은 끝난 것일까?
‘사랑의 포르노화’ 인지, ‘포르노의 사랑화’인지 헷갈릴 정도로 세상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북적이지만 사람들은 공허로 몸서리치고, 불안이 지나쳐 신경증과 우울증을 앓고 있다. 신자유주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쇼핑몰’의 세계에서는 상품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우열이 평가된다. 값어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돈이 많아야 한다. 반대로 돈이 없으면 값어치 없는 인간으로 취급된다. 다들 자신의 '값어치'를 증명하기 위해 아등바등 산다. 상대적 부에 따라 줄 세워지는 시대에는 사랑도 앞줄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치품이라는 착각을 준다. 취업을 포기하고, 사랑을 포기하고, 결혼을 포기한 세대들을 보며 쇼핑몰의 논리가 사랑도 위협하고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여기에 관계 자체를 피곤해하는 풍조와 언택트 시대가 맞물리면서 세상은 점점 사랑이 설자리를 잃어가는 듯한 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왜? 지금 여기의 일상에서 내가 사랑을 믿고, 느끼고, 고민하기 때문이다. 10여 년의 결혼 생활을 통해 '나만의 행복을 고민하던 나'에서 '그의 행복에 관심을 갖고 우리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사랑도 신앙처럼 믿는 자에게만 있는 게 아닌지 문득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