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방이 아닌 '나비'가 되는 세상
2017. 9. 30
어른과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육 학년인 그 아이는 내년에 시내의 큰 중학교에 갈 것이며, 저녁에는 매일 집으로 영어교사가 와서 과외를 받는다고 하였다. 주말에도 교회에서 영어 회화 스터디를 한다고 하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 보였다. 조금은 조숙해보이며 당차보이기까지 하던 그 아이의 꿈이 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현아, 너는 꿈이 뭐니?"
"UN(국제연합)에서 일하고 싶어요."
"그래서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는구나. UN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거야?"
".......네?"
"이를테면,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UN에 있을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알리려고 노력했잖아. 현이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건데? 왜 UN에서 일하고 싶은 거지?"
"글쎄요......."
어른들의 대화에 계속해서 끼어들던 그 아이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이 상황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은 아닐까 싶은 건 지나친 우려일까? 저마다의 꽃을 찾아 열매를 맺도록 돕는 나비가 아니라, 무조건 환한 곳을 향하여 돌진하는 가로등의 나방이 될까 그 아이의 앞날이 걱정 되었다.
그 아이와의 대화 후 허전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직업을 통해 타인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상상력 부재상태. 한나 아렌트는 이를 두고 '무사유성(thoughtless)'이라 하였으며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확장시켰다.
그녀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Holocaust)은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지시를 무비판적으로 따랐을 뿐인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음 갈파했다.
UN에서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에게 멋져 보이고 폼나니까 UN에 들어가기 위해 매일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 부모도, 선생님도 그 아이 주변의 어느 누구도 직업은 무엇이 '되기' 위한 게 아니라 무엇을 '하기'위해 갖는 것임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듯하다. 나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헤아리고 배려하는 능력은 사회적 인간의 자질로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하루의 시간 중 제일 많은 '하기'를 해야하는 직업에서 '배려'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다.
배려는 가르치지 않고 지식습득만 강요하는 어른들. 공부기계로 자라고 있는 아이는 어쩌면 꿈을 키우고 있는 게 아니라 '평범한 악'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경각심을 가지고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날이 쌀쌀했다.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덩치만 크고 기괴한 나방이 불빛을 향해 사방팔방 날아다니는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