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투명인간이 되었다.
아무도 나같은 건 신경쓰지 않았다.
조그마한 아이가 공포에 벌벌 떨든
맞는 엄마를 보고 가슴에 피멍이들든
그 일이 끝나고 나서도
아무도 나같은 건 신경쓰지 않았다.
그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나에게도 투명인간이 되었다.
나도 나같은 건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두려움을 버리고, 슬픔을 버리고,
분노를 버렸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일이 반복될 수록
나는 점점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친구의 눈물도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것이
삶의 목표인 양 무언가 쫓기듯 살아왔다.
알수 없는 불안감이 눅눅한 습기처럼
가슴을 옥죄어 왔다.
이따금 사람들과 나 사이에도
투명한 막이 생긴듯한 기분이 들곤했다.
불청객이 되어 엉거주춤하며
어색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나는 내가 예민한 감정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마흔 가까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서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가 아프거나 울면 내 마음도 같이 아프며 슬펐고
아이가 웃거나 기뻐하면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내가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있다고 여겼는데
힘들다고 화내고 짜증내는 엄마를 한결같이 사랑해주는 건
언제나 아이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아이를 통해 조건 없는 깊은 사랑을 느꼈다.
아이의 사랑을 통해 얼어붙었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갔다.
아이와 함께 크게 소리지르며 다투던 날 처음으로 화에 대한 자유를 느꼈다.
안도감 속에서도 화를 낼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아이를 키우며 내가 그렇게 갈구하던 조건 없는 사랑은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타고난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신과 닮은 마음인 조건 없는 사랑은 이미 우리 안에 있기에
예로부터 깨달은 이는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요즘 나의 공부 주제이다.
어이 없게도 몇 년 전에도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인간 본성은 사랑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걸 머리에서 가슴으로 인정하기 까지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의식 속에 버려둔 마음을 쉬운 말로 '내면 아이'라고 한다.
내면 아이는 계속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불안,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은 내면아이가 보내는 직접적인 신호이다.
(너무 아프니까 내면아이가 보내는 신호에 귀를 막아 버리면 무감각과 무기력이 된다-의식적으로는 느끼지 못해도 무의식에서는 저항하는 에너지가 계속해서 증폭되기 때문이다.)
여태껏 도망쳐왔던 감정이 내면아이가 자신을 봐 달라는 신호라는 거다.
내면 아이를 고치거나 수정하려는 의도 없이, 내면 아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만나는 것이 본성을 회복하는 한 방법이다.
여기까지가 지구별 여행 중 내가 알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앎은 언제든 수정 될 수 있다.
투명인간이 되었던 아이와 만나고 나서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