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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걷는여자 May 26. 2018

영화 <오아시스>리뷰

우리네 삶의 오아시스

한겨울에 혼자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는 남자가 있다. 뺑소니 사고 후 출소한 홍종두. 버스 정류장에서는 능청스레 담배 한 개비를 빌려 피우고, 얼마 안되는 푼돈으로는 노점상에 걸려있던 가디건을 어머니 선물로 사느라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써버린다. 오랜만에 찾아간 집엔 낯선 아주머니가 살고 있다. 가족 모두 종두에게 알리지 않고 이사를 가버린 것이다. 염치가 없는 건지 뻔뻔한 건지 고기집에서 무전취식을 하고는 파출소에 연행되어 가까스로 동생 종세와 연락이 닿는다. 예전부터 형님집에 얹혀 살고 있던 모양인지 출소한 종두를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형수는 싫은티 팍팍 내며 대놓고 푸대접을 한다.


"어른이 된다는거는 인제 니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거야. 자기 행동에 책임도 지고, 남이 날 어떻게 보나 그것도 생각하고, 한마디로 이사회에 적응을 해야돼. 그게 어른이 되는거야.."


이제 그만 어른이 되라며 형 종일은 종두에게 중국집 배달원 일자리를 소개하지만 하루만에 짤린다. 화투판에서 지고 있던 아저씨의 노래를 흥에 겨워 계속해서 따라부르는 등 앞뒤 상황파악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종두는 어른이 되기에 실패한 천덕꾸러기 신세이다. 이 사회의 부적응자로서 가족에게 조차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런 종두의 외롭고 누추한 세계에 한공주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같은 집에 혼자 뎅그러니 남겨진 중증 장애인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단지 미안한 마음에 뺑소니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갔는데, 마침 공주의 오빠내외가 공주만 남겨놓고 장애인 아파트로 이사를 가던 참이었다. 공주는 안면근육과 팔다리가 뒤틀려 있어 의사소통도 움직임도 버거운 중증 뇌성마비환자이다. 거울에 반사된 햇살을 보며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비둘기와 하얀 나비를 상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어른이 되지 않는 피터팬같은 종두는 웬디에게 끌리듯 한공주가 예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주에 대한 종두의 다가섦은 감정적이고 일방적이었다. 불쑥 찾아가 예쁘다며 공주의 몸에 손을 대다가 욕정을 느낀 종두. 낯선 남자의 손길에 너무 놀란 공주는 기절해버리고, 종두는 혼란스럽고 죄책감을 갖는 마음에 더 이상 공주를 찾아가지 않는다.


세상사람들은 '중증 장애인'이라는 프레임에 가둬놓고 그녀를 대한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전부인 사막같은 공간에 유폐된 공주. 두렵던 그 사건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종두를 통해 외출할 때 립스틱을 바르고픈, 자신도 '여자'임을 자각하게 된다. 밤이 되면 '오아시스 그림'에 어른 거리는 창 밖 나무그림자가 무서워 잠을 이루지 못하던 공주는, 어느 밤 종두에게 전화를 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되고 서로의 삶에 오아시스가 된다.


세상의 이목에 신경쓰지 않는 종두 앞에서, 공주는 평범한 사랑받는 한 여자가 되곤한다. 맛집에 찾아가지만 거부당하고, 형이 운영하는 카센터의 차고에 숨어들어가 짜장면을 시켜먹지만 두 사람은 행복하다. 지하철 막차를 타기위해 한 손에는 휠체어를, 등에는 공주를 업고 달리는 장면도 인상깊었다. 공주와 데이트를 하느라 카센터에 맡긴 손님차를 무단으로 타는 사고를 치고 형에게 각목으로 엉덩이를 맞을 정도로 애취급 당하지만 공주와 함께일때 만큼은 듬직한 남자가 된다.


'공주마마와 홍장군(극 중 애칭)'의 사랑은 위태해보이지만, 편견의 장벽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위대해보였다. 나는 누군가를 오롯한 존재로 사랑해 본적이 있던가? 또 누군가에게 오롯한 존재로 사랑받아본적이 있던가? 누군가를 무조건적인 환대의 마음으로 받아들여 본적이 있었는가의 물음 앞에 부끄러워진다.


활짝 열려있는 종두의 환대 앞에 활짝 핀 꽃이 되어 존재를 드러낸 공주, 공주를 위하는 장군이 되어 일방적인 사랑이 아닌 성숙한 사랑을 하게되는 종두를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사랑의 기술)던 에리히 프롬의 말이 떠오른다. 그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는 사랑을 더 원하고 있고, 받는 사랑에 더 익숙하다는 뜻이리라. 영화 《오아시스》는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사람을 통해 '주는 사랑', 그리고 '사랑할 줄 아는 능력'에 대해 긴 여운을 주었다.


"인간은 살며 사랑하다 그리고 죽는다."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의 말이다. 어쩌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때론 그 광막한 사막을 걷다 권태에 빠지기도 하는 우리네 삶에 오아시스란 "사랑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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