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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생명'이다.

중용의 사랑

by 느리게걷는여자

2016. 10. 16. 가을비 내림

철학자 윤구병 선생님의 강연을 듣다가 어떤 깨우침이 있었다.

"여러분, 생명의 가장 큰 특성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국어사전에 '생명生命'이란 '살아있게 하는 힘'을 뜻하며, '살다'라는 말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라고 풀이된다. 뜻풀이가 순환논리에 빠져있는 듯 보이지만, 그만큼 '생명'과 '살다'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생명'을 지닌 것에만 '살다'라는 말을 쓴다. 들풀이 살고, 개미가 살고, 곰팡이가 살고, 고라니가 살고, 사람이 살고....... 하늘과 땅 사이에는 온갖 종류의 생물들이 함께 뒤엉켜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통틀어 '자연自然'이라고 말한다. 본래 동양에서의 자연自然이란 영어로 'nature'가 아닌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을 지닌 'self-so'가 본 의미에 가깝다고 한다.

윤구병 선생님께서는 바로 '스스로 그러함을 갖는 성질'인 '자발성'이 생명의 가장 큰 특성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요즘 부모들은 사랑이 지나쳐 자녀들의 자발성을 질식시키고 있다. 오죽하면 다 큰 청년들이 자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며 살고 있는 세태를 가리켜 '캥거루 족'이라는 신조어가 떠도는지....... 청년실업이라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섞여있기는 하지만 도가 지나친 구석이 있다.

나는 부모들의 '무절제한' 사랑이 자녀들의 자발성을 질식시키는 위험 요소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더라도 혼자 해결하거나 견딜 수 있는 일, 그저 시간이 좀 더 필요한 일에 대해서는, 답답하거나 안쓰럽더라도 개입하지 않고 아이 스스로가 깨우치고 해결할 시간을 주는 인내심과 믿음이 필요한데, 나의 경우만 봐도 그런 절제를 발휘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아이가 정말 필요한 때에 적절한 도움을 주는 '중용의 사랑'이 절실함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아이들 마다 성향과 기질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떤 지식과 정보로도 내 아이가 필요로 하는 '제때와 적절함'을 파악하기 어렵고, 어느 것이 아이를 위한 최선의 길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딜레마이다. 그렇기에 자녀 양육은 지식이 아닌 고도의 '지혜'와 내 아이 만의 유니크함을 파악하는 '지속적인 관심'을 요하는 일이다.

또 하나는 배움에 있어 자녀를 '생명'으로 보지 않고 기계적으로 보는 관점에 있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짐승과는 다른 '인간다움'을 체득해나간다. '투입'한 만큼의 '산출'을 얻을 수 있을거라는 기계적 관점은 자녀의 머리가 소프트웨어인 마냥 입력시키고 개발시켜야 한다는 강박을 만들고 그게 부모의 중요한 임무라 여겨 한 참 뛰어놀 나이에 사교육 순회를 시키게 만든다. 사교육은 아이들이 스스로 터득할 기회를 빼앗아 자발성을 질식시키고, '인간다움'을 배울 시간마저 빼앗는다. 인간다움은 주입된 지식이 아닌, 몸으로 체득된 지혜를 통해서인데 요즘 아이들은 몸놀릴 시간이 한참 부족해보여 안타깝다.

나무는 누군가 꽃피우라고 해서 꽃피우는 게 아니고, 누군가 열매 맺으라고 해서 열매 맺는 게 아니다. 다만 '스스로 그러할self-so' 뿐이다. 우리 아이가 '생명'임을 항상 인식한다면 아무 때나 비료와 물을 쏟아 붓는 어리석은 사랑은 절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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