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선택하게 된 순간들
뭔가를 결정할 때는 한순간이지만, 그 순간까지 여러 장면과 마음이 켜켜이 쌓여 선택의 방향을 만듭니다. 라디오 DJ로 일하면서 청취자분들이 제게 한 번씩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라디오 DJ를 하려고 선택하셨어요?"
참 많이 질문을 받아봤습니다. 이 질문도 보면, 다른 직업을 갖고 계신 분들께는 잘 하지 않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직장인에게, 왜 직장을 다니실 생각하셨나요? 라고 물어보시는 분 있을까요. 아니면 식당이나 카페를 차리시는 분께, 왜 카페를 차리실 생각을 하셨나요? 글쎄요, 잘 안 물어보는 것 같습니다.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 그리시는 분들은 ‘잘 그리니까 작가를 하셨겠지’라고 생각이 들죠. 그렇지만 라디오 DJ는 하겠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궁금해집니다. 왜, 라디오 DJ를?
아마도 ‘왜’라는 질문에는 여러 뜻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직업 중에 왜 하필 라디오 DJ를 하는 것인지, 한다고 하면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 라디오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반인이 왜 하시는 것인지, 라디오 DJ에 대한 재능이 있어서 하시는 건지? 이 외에도 다른 뜻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왜 하시는 거죠!
예전부터 쭉 라디오 DJ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건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또렷하게 꿈으로 다가오진 않았던 거죠.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조금씩 라디오에 대한 인상이 쌓이며 마침내 선택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 라디오에 대한 인상을 가진 건 열두 살 때쯤이었어요. 방학이 되면 가족과 함께 시간이 남을 때마다 먼 친척 집에 놀러 가서(어릴 때는 꽤 먼 곳이라 생각했는데 성인되고 나니 약 1시간 30분가량의 거리)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하룻밤 자면서 시간을 보내고 왔거든요. 그날도 부모님이 일을 마치고 가족 모두가 차를 타고 강원도 친척 집에 내려가는 길이었어요.
어두운 밤, 자동차의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빠져 낭만을 즐기는 게 참 좋았습니다. 가는 길에는 엄마를 비롯해 자매들은 졸려서 차에서 잠을 잤었고, 저와 아빠만 늘 자지 않고 차 안에서 밤 풍경을 바라봤거든요. 아빠는 적막을 깨기 위해 항상 라디오를 틀었는데, 그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DJ의 차분한 목소리와 멘트가 감성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라디오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 저에게 라디오는 '따뜻한 감성을 주는 것'으로 느껴졌어요.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DJ의 멘트는 잘 써진 책을 읽는 것처럼 흥미롭고 또 따뜻했습니다.
그 이후 심심할 때 라디오를 찾아 들어야겠다고 집에 있는 오디오로 들어보기도 했는데요. 기기에 서툴던 저는, 시간대를 잘 맞추지 못하고 DJ의 멘트는 잘 듣지 못하고 이상한 노래만 잔뜩 듣다가 포기했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보다는 DJ의 멘트를 더 듣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또 한 번 라디오와 마주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대학교에서 라디오 수업이 있어서 수강한 적이 있었어요. ‘방송 작가 수업’이었는데, 그중 라디오와 관련된 수업이 1-2회 정도 있었습니다.
라디오 대본을 쓰려면 어떻게 쓰면 좋을지에 대해 배웠고, 교수님이 한번 오프닝 대본을 써보라고 과제도 내주셨어요. 그날 밤, 책상에 앉아 원하는 라디오 분위기를 떠올리며 종이에 오프닝 멘트를 썼다 지웠다 하면서 적어 내려갔습니다. 아직도 그때가 생각납니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적은 오프닝 멘트를 읽으며 머릿속으로 상상해봤어요. 내가 라디오를 하게 된다면, 내가 이 멘트를 읽는다면 어떨까. 내 목소리가 많은 사람에게 전해져 좋은 위안과 기쁨이 됐으면 좋겠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결심했죠. 만약 라디오 DJ를 할 수 없다면 라디오 작가가 되어야겠다. 그 이후 수업에서 교수님은 라디오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셨는데 듣기에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라디오 작가는 공고가 잘 나지 않았고, 난다고 해도 언제 자리가 있을지 몰라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교수님도 라디오 작가만을 위해 준비하지는 말라고도 충고해주셨죠. 정말 검색해보니 라디오 작가가 되는 길은 바늘 구멍처럼 좁았습니다. 그때 마음속으로 스르르 라디오 작가가 되는 걸 접었던 것 같아요.
마음 속에서 접었지만 없어지지는 않았나 봅니다.
직장을 다닌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퇴근 후 피곤한 몸으로 버스 기사님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집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아무 노래도 들을 힘이 없어서 창밖을 내다보며 가는데, 버스 기사님이 틀어놓으신 라디오가 들리는 거예요. 저녁 6시에 하는 배미향의 <저녁스케치>라디오였죠. DJ 배미향님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데, 마음이 따뜻해지며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DJ 멘트가 끝나고 잔잔한 팝송이 흘러나왔고 그 순간 스트레스가 풀리며 에너지가 생기는 거예요.
그때 제게 라디오는 마음을 안아주는 따뜻한 물건이었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도 잡히지 않지만 딱딱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는 참 포근하고 따뜻했죠. 그때 느꼈습니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이 큰 위안이 될 수 있겠구나. 라디오는 참 좋은 것이구나.
그래서 저 또한 라디오를 통해 누군가에게 좋은 마음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은 갖고 있었지만 직장을 몇 년 동안 다니던 때였어요. 인터넷 개인방송이 막 인기를 끌던 시기에 자유롭게 가입만 하면 원하는 방송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플랫폼이 생겼죠. 퇴근 후 심심하던 차에 ‘개인방송 플랫폼에서 라디오를 해보자’ 하고 라디오 이름을 정하고 보름달 사진을 걸어두고 라디오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 제가 했던 라디오 이름이 '창밖의 라디오'였어요. 항상 창밖을 바라보며 라디오를 듣기도 했지만 내 라디오를 듣는 사람 또한 어떤 공간에 있어 ‘창밖’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의미로 정했죠. 창문을 열면 내가 있는 공간에서 세상과 연결이 되잖아요. 그런 의미로 라디오 이름을 정하고 방송을 켜봤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안 듣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명 두명이 오더니 제 목소리를 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제 목소리를 들어준다는 것에 들떠서 청취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눴죠. 재밌어서 다음날도 퇴근 후에 라디오를 켰는데, 같은 청취자분들이 또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아마 다섯 여섯분 정도였는데 2-3시간 동안 제 방송에 머물며 저를 응원해줬습니다.
다음날 출근이라 마무리를 하려고 했더니, 청취자분들이 더 하자고 해서 4시간 동안 한 적도 있었어요. (물론 잠을 덜 자서 다음날 출근해서 졸았습니다.) 그때가 겨울이었거든요. 갑자기 목을 많이 쓰니 체력과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감기에 걸려버린 거예요. 목소리를 내면 목이 아파서 라디오를 켤 수 없었어요. 3일이 지나고 라디오를 켜서 말을 해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더라고요. 아무것도 모르고 재미로 시작해서 컨디션 조절할 줄도 몰랐던 거죠.
꾸준히 하는 것도 어려웠죠. 직장 다니면서 회식할 때도 있고, 야근할 때도 있어서 남는 시간에 라디오를 켠다는 건 쉽지 않았어요. 기다리는 분들께도 죄송해서 라디오를 한참 켜지 않다가 조용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또 라디오를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라디오를 하고 있나 봅니다. 제가 라디오를 하겠다고 말했을 때, 주위에서는 "줄리가 언제부터 라디오를 좋아했어?"라는 반응을 보였어요. 라디오를 엄청 좋아하는 팬은 아니었고, 오히려 라디오를 만들고 싶은 쪽에 가까웠는데 어떻게 할 줄 몰라 자주 표현하지는 않았거든요.
좋아하는 일이지만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할지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건 쉽지만 잘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저 또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라디오를 혼자 시작하면서 제 목소리를 좋아해 주시고, 제 라디오를 편하게 생각해주시고 마음으로 응원해주신 분들 덕분에 지금까지 쭉 라디오를 하고 있습니다.
라디오 DJ가 인기 많은 직업도 아니고, 잘 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라디오를 믿고! 저를 믿고! 쭉- 해나가려고 합니다. 제 라디오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받는 분들이 늘어나길 바라며, 좋아하는 일하면서 살려고요.
우리 같이, 좋아하는 일하면서 살아요-!
▼ 라디오 에세이 팟캐스트로 듣기
▼ 유튜브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