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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롱박 Apr 27. 2020

<네 잎 클로버와 개구리밥>

아주 짧은 희곡 - 식물에 대한

1. 등장인물

초록 / 26세, 하얀의 언니

하얀 / 23세, 초록의 동생



2. 장소

초록의 병실



3. 때

저녁. 해 질 녁. 



4. 이야기


병실. 차가운 백색 조명이 들어온다. 초록이 창가 자리 침대에 누워있다. 침대 옆에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있고 침대에 등을 기댄 채 하얀이 앉아 있다. 하얀은 책을 읽고 있다. 초록은 창을 바라보고 있다. 창 밖은 병실과 다르게 오렌지 빛으로 물들고 있다. 해 질 녘. 


초록    (창밖을 보며) 동생아.

하얀    ...

초록    (하얀을 보며) 야, 하얀아

하얀    ...

초록    (다시 창밖을 보며) 해가 지는데... 해가 진다. 

하얀    (책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하지 마라. 

초록    알았어.    


하얀은 계속해서 책을 읽는다. 초록은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 다시 하얀을 부른다. 


초록    동생아. 저 것봐. 저 나무 좀 봐. 


하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초록을 바라보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긴다. 


초록    저 나무도 잎이 무성했을 텐데 지금은 앙상하네. 좀 우습긴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마지막 잎새가 좀 이해되는 것 같아. 왜 우리 어렸을 때 그 이야기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울기도 하고 그랬잖아. 어른되고 생각했을 땐 왜 그랬나 싶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하얀    (책을 잠시 내리고 초록을 보며) 뭐 어떻게 됐는데?

초록    아니...

하얀    (다시 책을 읽으며) 하지 말라고 했다. 


초록은 다시 창밖을 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깐 울컥한다. 애써 눈물을 참고 맘을 다스린다. 


초록    (결심한 듯 하얀에게) 동생아. 이런 이야기 듣는 거 쉽진 않겠지만 내가 이야기할 사람이 너 밖에 없어서 그래. 자꾸 머릿속에 생각이 넘치는데 너 아니면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아니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만 시간을 내서 들어주면 안 될까?

하얀    (한 숨을 쉬고 책을 무릎에 엎는다.) 뭐? 뭔데?

초록    (들뜬다) 너 기억나? 우리 어렸을 때, 아파트 단지 안 풀밭에서 자주 놀았잖아. 그때 개미도 잡고 풀도 뜯고 그러면서 매일 놀았던 거 기억나? 

하얀    응. 언니는 풀 가지고 놀고 나는 나무 타고. 

초록    그래. 그 풀밭. 너 기억날지 모르겠는데,

하얀    기억나

초록    그렇지? 

하얀    그래서?

초록    그때 거기서 

하얀    그래 거기서?

초록    우리 네 잎 클로버 찾으려고 며칠 고생했던 거 기억나?

하얀    네 잎 클로버?

초록    그래 네 잎 클로버 (갑자기 노래한다) 깊고 작은 산골짜기 사이로 맑은 물 흐르는 작은 샘터에 예쁜 꽃들 사이에 살짝 숨겨진 이슬 먹고 피어난 네 잎 클로버 랄라라,

하얀    (초록을 말리며) 조용히 해. 여기 혼자 있어?

초록    기억나?

하얀    기억 나. 

초록    그때 내가 네 잎 클로버 찾겠다고 학교 가기 전에 풀밭 뒤지고 학교 다녀와서도 풀밭 뒤지고 너도 내 옆에서 같이 찾겠다고 해가 다 넘어갈 때까지 그러고 있었잖아. 

하얀    그랬나?

초록    근데 우리 그때 네 잎 클로버 찾았게 못 찾았게?

하얀    뭐야?

초록    찾았게? 못 찾았게?

하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록    바보. 못 찾았어. 

하얀    (짜증이 난다) 아 뭐야. 

초록    네가 많이 울었어. 네 잎 클로버 왜 없냐고, 우리는 행운을 만날 수 없다고 그 풀밭 위에서 네가 많이 울었어. 나는 그런 너한테 꼭 찾아 주겠다고 나도 울어서 콧물이 입으로 들어오는데도 계속 풀 밭을 뒤졌었지.

하얀    그랬냐. 참 가지가지했다. 

초록    그날 밤에 엄마가 해주셨던 이야기 기억나?

하얀    이야기?

초록    응. 하도 울어서 둘 다 눈이 팅팅 부어있는데 엄마가 들려주셨던 이야기. 우리 그 뒤로 네 잎 클로버 안 찾기로 했잖아. 그 이야기 기억나?

하얀    (생각한다) 아, 기억난다. 

초록    그렇지?

하얀    큰 손들이 어쩌고 개구리 밥이 어쩌고 그 이야기?

초록    (흥분한다) 그래 그거!

하얀    너는 진짜 별걸 다 기억한다. 

초록    (구연동화하듯) 클로버들은 사실, 모두가 네 개의 잎을 가지고 태어난단다. 모두가 네 잎 클로버로 태어나지. 네 잎 클로버들은 햇살과 이슬을 먹고 매일 무럭무럭 자랐어요. 새싹일 때 올려다보았던 조약돌 보다 키가 커진 어느 날, 손가락들이 찾아왔어요. 손가락들은 말했어요. "네 잎, 네 잎 클로버를 찾아야 해. 데려가자! 데려가자!"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하얀은 체념한 듯 먼 곳을 본다. 


초록    그 소리를 들은 네 잎 클로버들은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었어요. "이제 어떻게 하지? 우리는 뛰어서 도망갈 수도 없는데?" 그때 멀리서 바람이 속삭였어요. "잎 하나를 떨어트려! 잎 하나를 놓아줘!" 바람의 목소리는 클로버들의 잎사귀 사이사이로 흘러 왔어요. 클로버들은 말했어요. "그래, 잎사귀 하나를 떼어내자. 할 수 있어. 자 모두 잎사귀 하나를 버려!" 클로버들은 눈물을 머금고 네 개의 잎사귀 중 한 장을 떼어내기 시작했어요. 


하얀은 주변의 환자들에게 겸연쩍은 표정으로 눈인사를 한다. 


초록    하지만 아직 키가 작던 아기 네 잎 클로버는 잎을 떼어낼 수 없었어요. 아기 네 잎 클로버는 어른 클로버들을 올려다보며 말했어요. "잎을 떼려고 했더니 너무 아파요. 무서워서 떼어낼 수가 없어요." 어른 클로버들은 말했어요. "그럼 우리 사이에 꼭꼭 숨도록 해, 우리가 숨겨줄게. 우리가 지켜줄게" 아기 클로버는 여린 잎을 최대한 움츠린 채 다른 클로버들 사이에 숨었어요. 손가락들이 말했어요 "없어? 없어?" 손가락들이 말했어요. "없어. 없어." 해님이 얼굴을 가리며 속삭였어요. "클로버들아 이제 손가락은 갔어. 안심해도 돼. 이제 한동안은 손가락들이 오지 않을 거야." "와아!" 클로버들은 소리치며 기뻐했어요. (손뼉 친다)


하얀    (끝난 줄 알고 손뼉 친다) 와아.

초록    그날 밤!

하얀    (한 숨 쉰다) 그래. 

초록    아기 네 잎 클로버는 세잎이 된 어른 클로버들에게 물었어요? "아프지 않아요?" "응, 아프지 않아." "세 잎으로 괜찮아요?" "그럼 괜찮지. 잎의 개수는 중요하지 않아. 이곳에서 함께 햇살과 이슬을 만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떼어낸 잎 하나는 어디로 가나요?" 아기 클로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어요. "놓아준 잎 한 장은 연못으로 갈 거야. 연못으로 가서 개구리밥이 될 거야." "개구리 밥이요?" "연못 위에 작은 잎들이 동동 떠 있으면 그게 우리의 네 번째 잎이라고 생각하렴" 아기 네 잎 클로버는 그 말을 듣고 안심할 수 있었어요. 아기 네 잎 클로버는 말했어요. "저도 무럭무럭 자라서 동생을 위해 세 잎 클로버가 될 거예요." 클로버들은 잠이 들며 대답했어요. "그래. 그러자. 우리는 함께 이곳에서 세 잎 클로버가 되자." 그날 밤. 클로버들은 따듯한 바람을 이불 삼아 편안하게 잠이 들었어요. 


잠시


하얀    울어?

초록    (눈물을 훔치며) 아, 아니. 

하얀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냐?

초록    내가 좀 바꿨어. 

하얀    엄마가 그 이야기해줬던 건 기억나. 이렇게 까지 스펙터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록    엄마 보고 싶다. 


하얀이 초록을 바라본다. 


하얀    그만해라. 

초록    그냥 문득 이 이야기가 떠올랐어. 그리고 꼭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어. 

하얀    왜?

초록    내가. 지금 세 잎 클로버 같아서. 

하얀    또 뭔 소리냐. 

초록    네 개의 잎 중에 하나를 떼어내고 세 잎 클로버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기에 나는 있고. (울컥한다) 조금은 희망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떼어낸 자리가 너무 쓰리고 아프지만, 그리고 이 세 개뿐인 잎사귀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을 말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 (흐느낀다)


잠시 


하얀    야... 너 맹장 수술했어. 

초록    (울면서) 그러니까! 맹장이 내 네 번째 잎이었던 거야. 나는 이제 더 이상 네 잎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클로버로 남아서 행운은 아니지만 행복을 말하고 싶어. (운다)

하얀    (한 숨 쉰다) 그래, 그래라... 네 맘대로 해라. 

초록    (구슬프게 노래한다) 랄랄라 한 잎, 랄랄라 두 잎, 랄랄라 세 잎, 랄랄라 네에잎.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수줍은 얼굴의 미소.


하얀은 반응하지 않는다. 잠시 시간이 흐른다. 울던 초록은 진정하고 창 밖을 본다. 하얀은 다시 책을 읽는다. 


초록    그 후에 내 생일에 네가 준 카드에 네 잎 클로버가 붙어 있었잖아. 네가 세 잎 클로버 하나 따서 테이프로 붙이고 빈자리에 사인펜으로 잎사귀를 하다 더 그려서 줬었잖아. 나 그거 중학교 때까지 서랍에 뒀었는데 이사하면서 잃어버렸나. 어디 뒀는지 모르겠어. 

하얀    (책을 읽으며) 말라비틀어져서 가루가 됐겠지. 

초록    엄마 보고 싶다. 

하얀    (책을 읽으며) 엄마 오늘 못 오신다고 몇 번 말하냐. 죽을병 걸렸냐?


잠시


초록    내 맹장 세포도 생명인데 같이 살았어야 하는,

하얀    (읽던 책을 덮어 던진다) 진짜 죽고 싶냐?


간호사(목소리)    백초록씨 식사 나왔습니다. 

초록    (큰 목소리로) 네! 여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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