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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Apr 24. 2020

<태수의 모놀로그>

10분 희곡

태수 :

(한숨을 크게 내쉰다)아저씨. 저번에 아저씨 자제분께서 다닌다고 말씀하셨던 ‘분노조절 클리닉’ 있잖아요, 저도 그거 다녀야 할까 봐요. 아까 저 많이 볼썽사나웠죠? (손으로 귀를 막으며)대답하지 마세요! 대답 안 하셔도 알아요. 사람들이 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지도 모르고 계속 소리를 질러댔으니…. 지금쯤 다들 삼삼오오 모여 쑥덕거리고 있겠죠. 고작 방울토마토 하나 때문에 사람 눈이 돌아갔다고. 네, 맞아요. 저 눈 돌아갔었어요. 그 사람이 방울토마토를 먹고 있는걸 본 순간, 분노 괴물이 제 몸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어요.


(한숨을 쉰다)이제, 사람들, 저 보면 슬금슬금 피하겠죠? 애 가진 부모들은 저랑 마주치는 순간, 애들 귀를 막거나 눈을 가릴 거예요. 그리고는 ‘저 형 옆에 가면 안 돼.’라고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하겠죠? 아저씨, 저는 이게 너무 억울해요. 잘못한 건 그 사람이고, 평소에 눈 동그랗게 뜨고 성질내던 사람은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었단 말이에요! 억울해 죽겠어요! 아까 아주머니들이 괜찮냐고 물어보니까 그 사람 눈물 흘리는 거 보셨죠? 아니,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자기가 우냔 말이에요. 그 인간은 늘 그랬어요. 처음부터 자기가 피해자인 척. 그 인간이 술 취해서 제 텃밭에 토했을 때도 그래요. 제가 분명히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안 그랬다고 우기데요? 그래서 제가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줬어요. 얼굴이 벌게져서는 초상권 침해라는 둥 법적으로 문제 제기할 수 있다는 둥 화를 내더라니까요? 화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어이없게. 그 사람이 제 텃밭에 만들어 놓은 토사물, 결국 제가 치웠다니까요. 지난번에 그 인간이 담배꽁초 버렸을 때도! (이야기를 멈추고 한숨을 쉰다)이런 말 한들 무슨 소용 있겠어요. 결국 나만 나쁜 놈 이지 뭐, (들으라는 듯이)결국, 나만 방울토마토에 미친 놈이지 뭐!


사람들은 몰라요, 농부가 쌀을 거두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는지. 비가 안 와서 벼가 말라 버리진 않을까, 거친 비바람에 벼가 쓰러지진 않을까, 밤낮으로 걱정하는 그 마음을요. 사람들한테는 삼시 세끼 밥상에 오르는 그까지 쌀 그것뿐이겠지만, 적어도 농부한테 그 벼는…, 이 세상 전부일 거예요. 삶의 의미요! 저한텐 방울토마토들이 그랬어요. 그런 농부의 마음으로 그 아이들을 길렀다고요. 하나하나 이름도 지어 줬었는데…, (훌쩍이며)토미! 네네! 있는 돈 없는 돈 아껴서 애지중지 사 모은 피규어, 망가질까 마음껏 만져보지도 못한 그걸 조카 놈이 와서 날름 가지고 갔을 때의 심정이 이런 걸까요? 그래서 우리 형이 재작년 설날에 그렇게 입이 나왔나 봐요. 나잇값 못한다고 속으로 엄청 욕했는데 미안해 형, 몰라줘서 미안해….


아까 텃밭에 갔을 때, 내 새끼들이 달려있어야 할 자리에 방울토마토가 없는데, 제 기분이 어떻겠어요? 그런데 그 인간, 뻔뻔하게 내 새끼들을 입속에 집어넣고서는 “왜요?” 하는데, 제가 꼭지가 안 돌겠어요? 그 인간이! 제 안에 잠자고 있던 분노 괴물을 깨운 거라고요. 그때, 전 잠시 정신을 잃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그 사람 손에 있던 방울토마토를 낚아채서 제 입안으로 쑤셔 넣고 있더라구요. 그럼 안됐는데.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게 하면 안 됐는데. 자기 자식을 집어삼킨 크로노스와 제가 다를 바가 뭐가 있겠어요!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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