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느낀 스트레스 리스트
오랜만에 전 직장 동기 모임을 나갔다.
24살 때 만난 동기들, 내가 제일 막내였고 올해 내가 서른이니 언니, 오빠들은 이제 유부남, 유부녀가 되었다. 이제 대화의 주제가 연봉, 출산, 육아로 바뀐 걸 보니 시간이 흘렀음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단연 그 날의 이야기 주제는 퇴사, 이직이었다. 아직 직장에 다니고 있는 동기들은 나의 퇴사 후 생활을 궁금해했다.
“퇴사하니까, 어때? 진짜 솔직하게 한 번 얘기해줘봐 봐.”
제일 성격 급하고 꾸밈없는 동기 오빠 한 명이 테이블 멀리서 쓰윽 질문을 던졌다.
2주 정도는 좋고, 퇴사 실감이 안나더라구.
바로 출근하면 일할 수 있을 정도로 조금 긴 여름휴가를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시간이 지날수록 직장이 없으니까 소속이 없다는 게 새로운 사람 만날 때 어려운 거 같아.
나를 소개할 게 없더라고
그때 미처 다 하지 못한 진짜 퇴사 후 이야기를 정리한다.
결론은 직장을 다녀도 스트레스, 안 다녀도 스트레스다.
다만 어떤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선택할 뿐이다.
퇴사 후 스트레스 1. 가족편
아침 8시 아빠는 출근하는데 나는 아직 꿈나라다. 아빠가 출근하는 소리도 못 들었다.
문득 다 큰 딸을 두고 출근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어떨까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직장 다니는 동생한테 은근슬쩍 무시당한다.
언니의 피해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돈 버는 사람이 갑이다.
“이 집에서 돈 버는 황금알 누구야(동생이 자주 하는 말)”
나는 조용히 일하고 오신 동생의 야식을 준비하며, 식후 다리를 주물러 드린다.
하루 종일 엄마와 붙어있으며 잦은 말싸움을 한다.
책상에만 앉아있지 마라. 움직여라.
엄마, 제가 놀기만 할 나이 어린 백수 입장은 아니잖아요.
오늘은 태풍 바비가 오기 전 바람은 부는데 후덥지근함에 하루 종일 집에서 더위 먹은 듯 무기력해졌다.
엄마와 ‘에어컨을 틀자, 바람 부는데 꺼라’ 실랑이를 벌인다.
친척편
장례식에서 온 가족이 모여 나의 삶을 고민해주었다.
앞으로 계획은 있는 거니? 알아서 잘하겠지만 걱정이다.
“제 걱정은 제가 할게요.”
아버지의 친구들이 조문 왔다. 얼굴을 비추러 자리에 가니 나만 아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진다.
“응, 우리집 큰딸. OO 다니고 있어”
아빠, 제가 퇴사한 지 3개월이 지났어요.
주말편
일주일에 한 번인데, 데이트 비용이 살짝 부담된다.
맘 편하게 남친에게 데이트 비용을 맡기지도 못한다. 그의 사정도 있으니.
결혼은 무슨 결혼이냐. 연애도 못할 팔자.
망할 코로나, 퇴사 기념 여행도 못 갔다.
여행을 엄청 즐겼던 건 아니지만 왠지 퇴사 의식을 치르지 못한 것 같다.
덕분에 퇴직금은 아끼는 중.
직장이 없는데, 직장편
전 직장에서 승진한 사람들 이야기가 들린다.
내가 퇴사하지 않았다면, 내 자리 아니었나 싶어 괜히 아쉽다.
나는 자발적으로 퇴사했다.
직장 다니면서 이직하는 동기들이 부럽다.
나도 존버 하면서 월급루팡 하며, 이직할 걸 그랬나 싶다.
내 이력서는 프리패스처럼 면접을 볼 기회도 없다
친구편
막상 친구를 만나려니, 전 직장 동기 외 친구가 없다. 카톡이 고장 난 건가.
나 잘못 살아왔나.
시간편
시간이 잘도 간다.
지나간 시간, 퇴사 후 몇 개월인지 손가락으로 세어본다.
퇴사 후 공백기간이 길면 안 좋다고 한다.
빨리 해야 될 것 같은데 빨리 될 것 같진 않다.
이력서를 새로고침 해본다.
이직준비
자격증이 공백이다. 진짜 필요한 게 뭘까 고민하다가 컴퓨터 활용능력을 공부하기로 했다.
진작에 할걸 왜 코로나 터지고 했을까, 시험 접수 이미 마감.
퇴사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경력직 이직자에게는 솔직한 퇴사 사유가 필요하다.
이왕 프리패스당하는 김에 진짜 솔직해볼까?
이력서를 쓰다 보니 성장과정, 나의 모토 등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나의 이야기를 쓰는 건데도 첨삭을 받는다고 10만원 주고 수정했다.
이게 바로 자소설인가.
어떤 스트레스를 선택할 것인지는 당신의 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