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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 Feb 28. 2024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

얘야 봉투 하나 다오


"본부장님 어제 말씀드린 업무협약은..."

"넌 노크도 모르냐? 내 방에 문 안 두드리고 들어오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노크 안 해도 구두굽 소리로 누군지 아시잖아요."


남자들이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요란한 여자 구두굽 소리라고 하던데, 내 구두굽 소리는 내가 등장한다는 시그널 음악 같다고 한다.

물론 중요한 자리에는 앞 발가락에 힘을 모아 까치발로 최대한 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하지만, 220mm에서 225mm 사이의 어정쩡한 작은 발치수로 딱 맞는 구두가 없어 늘 헐떡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요란하다.


대부분 직장인은 사무실용 슬리퍼를 가져다 놓고 근무할 때나 화장실 다녀올 때 이용한다.

하지만 나는 30년 직장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사무실용 슬리퍼를 사본 적도, 신어본 적도 없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 높은 구두를 신고 다니기 힘들어 출퇴근 때는 운동화를 신고, 출장을 가거나 격식이 필요한 저녁 약속이 있을 때는 구두를 싸가지고 가서 미리 갈아 신는다.

사무실 안에서 물을 마시러 갈 때도, 프린트물을 가지러 갈 때도 마찬가지다.

이걸 아무한테 강요할 수는 없지만 가까운 사이의 후배들이 점심식사 후 칫솔을 입에 물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화장실을 가는 모습을 보면 잔소리 대마왕이 된다.

공공기관 특성상 외부 민원인들이 많이 드나드는데, 구두뿐 아니라 제대로 된 복장은 고객을 대하는 기본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림으로 복도에서 고객을 마주칠 수도 있다.

"이대리! 뉴요커처럼 살면 안 돼? 안 가봤지만 영화 보면 뉴욕은 세미정장에 스타벅스 커피 들고, 운동화 신고 출근하더라고..."


얘야 봉투 하나 다오!

지금은 그런 제도가 다 있어? 할 정도로 아주 꿈같은 추억 이야기인데, 1990년대 초 우리 회사는 한 달에 두 번, 수요일에 '체육의 날'이라는 게 있었다. 국방부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도 아닌데, 왜 그런 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체육의 날'에는 오전 근무만 하고 오후에는 체육동아리를 하던지, 영화를 보러 가던지 삼삼오오 각자 길을 간다. 체육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매달 1인당 3천 원씩 지원금도 줬던 것 같다.

원래 취지는 '체육은 국력'이라는 모토로 체육 활동을 장려한 것이겠지만 퇴근하고 집에 가도 무방했다. 심지어 11월부터 2월까지 동절기에는 오후 5시 퇴근이었다.

비록 월급은 아주 귀여웠지만 이런 게 공공기관의 맛이지라는 뿌듯함과 주변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으며 회사를 다녔다.


평상시 풀 장착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갖춰 입고 다녔지만,  어차피 오전 근무만 하는 '체육의 날'에는 편한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출근했다.

우리 부서는 교육용 교재를 만드는 곳인데, 민원인이 교재를 달라고 종종 오곤 했다.

어느 '체육의 날',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이 오셔서 각종 교재와 리플릿을 챙겨 드리며 간단하게 내용도 설명해 드렸다. 고맙다며 나가시던 어르신이 "얘야 봉투 하나 다오"란다.

 

'??? 얘라니...' 내 표정은 뭐 씹은 얼굴이었지만 최대한 표시는 안 내고 봉투를 넉넉하게 챙겨드렸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나?' 어르신이 나가고 기분이 나빠 풀풀거렸는데, 내 복장을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그 어르신은 내가 잔심부름이나 하는 사환(使喚)으로 보였나 보다.


새로운 업무를 맡으면 선배들에게도 물어보지만, 트렌드도 알고 좀 더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외부 교육을 많이 받으러 다녔다.

매주 토요일마다 '신규사업 개발 및 사업타당성 분석'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 마포로 다녔다. 3개월 과정이라 수강생들은 매번 같았지만 강사는 업계에서 나름 잘 나가는 전문가였다.

수강생 대부분 공공기관 직원들이고 강사는 혹시 인연을 맺으면 외주용역까지 연결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네트워크 측면에서 보통 3시간 수업을 마치고 수강생과 강사가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마친다.

수강생 중 여성은 나 혼자였는데 강사를 포함해서 대부분 친절하게 대해줬다.

지금도 밖에 나갈 때 웬만하면 길에서 어느 누구를 마주쳐도 창피하지 않을 정도로 다니는데, 한 날은 노는 토요일까지 화장하고, 치마 입고 가기 귀찮아서 콘택트렌즈도 안 끼고 두꺼운 안경에 청바지를 입고 수업을 갔다. 그런데 그날은 유독 강사가 내게 말도 안 걸고 약간 무시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 "

그때부터 나는 회사에서 옷을 갈아입더라도 지금까지 정장에 구두를 고수하고 있다.


직장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은 입사 초창기엔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춰서 출근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도 매너리즘에 빠지듯이 복장도 점점 편하게 입고 다닌다. 특히 근무복이 별도로 있는 회사에서는 편하다는 이유로 아예 출퇴근할 때도 근무복을 입는 직원들이 많다.


매사 열정과 진심을 갖고 일하는 후배 은화는 172cm의 키에 입사 초 항상 펜슬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입어 말 그대로 만화에서 튀어나올만한 오피스걸의 모습이었다. 우중충한 근무복을 입고 주르륵 앉아 있는 직원들 틈에서 유독 돋보일 수밖에 없었고,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만 서울 테헤란로에 걸어 다닐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IT 부서에서 엄청난 업무량과 반복되는 야근으로 은화는 점점 지쳐갔고, 자취하던 오피스텔도 회사 앞으로 옮기더니 어느 날부터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이해는 했지만 예전의 상큼한 오피스걸이 다시 보고 싶었다.

몇 년 전 우리 부서로 합류한 후 "너 그때 진짜 빛났어. 큰 키도 멋있었고... 내가 은화과장처럼 훤칠하면 미스코리아 대회 나간다."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 금방 파악한 은화는 다시 신입사원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테헤란로 걸로 다닌다.

부서장인 나와 은화까지 정장차림으로 다니니까 잔소리를 안 해도 다른 직원들까지 점차 제대로 된 복장을 갖추었다.


오늘 복장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종종 신규 채용 면접위원으로 들어간다.

요즘 면접은 '정장'보다 '단정한 복장 또는 비즈니스캐주얼'이나 '자율 복장'이라고 사전에 안내해 준다.

옷이 개인의 이미지에 주는 영향은 생각보다 큰데, 일률적인 정장을 입었을 경우 면접에서 진솔한 모습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자율(편하게) 복장을 권유한다.

이렇게 안내를 해도 여성들은 아래위 검정 또는 남색, 회색 스커트 정장을, 남성들은 넥타이 정장을 하고 온다.

그런데 안내한 대로 정말 편한 옷을 입고 온 면접대상자를 본 적이 있다.

보통 세네 명이 한꺼번에 들어와 면접관들과 마주 보고 앉는데, 그 팀에서 세 명은 정장을 입었고 딱 한 명의 여성만 오버핏 쟈켓과 펑퍼짐한 바지, 그리고 운동화를 신었다.

'우리 회사의 첫인상은 어떤지', '고객에게 응대할 때 자신만의 방법', '상사의 지시가 적절하지 않았을 때 대응 방법' 등의 질문에 대부분 비슷한 답을 했고, 오버핏 면접자도 아주 똑 떨어지게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잘 말했다.

옷을 왜 그렇게 입었는지 궁금하기보다는 답이 아주 훌륭했기 때문에 내심 그녀의 자신감을 보고 싶어 물었다.    


"이 질문은 정답이 없어요. 물론 나무라는 말씀도 아니고요. 편한 복장으로 오라고 사전에 안내도 해드렸는데, 다른 면접자들은 대부분 이렇게 정장을 입고 오셨잖아요? 선생님이 오늘 복장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면접을 마치고 면접관 질문이 어땠다, 기분이 나빴다 등이 바로 인터넷 취준생 카페에 올라오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하하. 제가 분당에 사는데요. 면접장에 오려고 내비를 쳐봤더니 거의 2시간이나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운전하기 편한 복장으로 입었어요."


아쉬웠다. 물론 복장이 면접시험 당락을 절대 좌우하지 않지만, 난 그녀가 " 페이스북 CEO 마크 저커버그가 집중력이 분산될까 봐 늘 회색 티셔츠를 입었듯이 저도 오늘 면접에 집중하기 위해 평상시 옷을 입고 왔습니다."라고 답하길 기대했다.

블라인드 면접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합격해 지금 우리 회사를 다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실력은 기본이고 외모도 중요하다.

오래전 함께 일했던 장본부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일만 잘하면 윗사람들이 이뻐할 것 같지? 내가 기획재정부나 행정안전부 회의를 가야 하는데, 누구를 데리고 갈까 하고 주변을 보잖아. 물론 담당자부터 찾겠지. 그런데 우선 넥타이를 맸거나 쟈켓 입은 사람부터 고르게 돼. 담당자라도 잠바 떼기 입은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잖아. 만약 그렇다 치더라도 그 잠바 떼기는 차 안에 있으라고 할 거야. 별거 아니지만 복장은 본인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고, 그런 정부부처 회의에 간 직원은 회사의 대표라고 할 수 있어."


그때는 뭐 그렇게 복장까지 미주알고주알 잔소리인가 했지만 맞는 말씀이었다.

예전 자기 계발서나 유튜브를 보면 대부분 내면 키우기, 마음 수양 쌓기가 최우선이라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외모가 중요하다, 노년에 귀티 나는 5가지 습관', '운명부터 바꾸고 싶으면 외모를 꾸며라', '여자의 외모 VS 능력 어떤 걸 선호할까?', '쓸데없이 고민할 시간에 옷부터 잘 입어라' 등 외모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를 많이 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세이노 님도 말씀하셨다.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믿지 마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외모를 본다.

외모가 주는 이점은 남들보다 앞선 출발점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외모에 전혀 자신이 없다면 실력을 두 배로 길러라.

당신을 궁극적으로 달리게 하는 것은 실력이다."



* 오늘 연재의 교훈 *

매력적인 옷차림은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주고, 그 자신감은 능력으로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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